인생에서 흥미진진한 다음 문장을 적기 위한 쉼표
하루 24시간 중 8시간. 출퇴근 시간까지 포함하면 10시간. 출퇴근 시간 2시간 빼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3할 또는 4할 이상, 거의 모든 시간을 회사에서 보낸다. 생각해보면 참 묘한 일이다. 가족보다, 친구들보다, 심지어 나 자신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곳이 회사다. 그곳에서 우리는 희노애락을 경험한다.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았을 때의 성취감, 상사의 무리한 요구 또는 타부서와 업무 우선순위 문제로 속상했던 기분, 모닝 커피 타임, 번개 회식 등 동료와의 소소한 일상에서 오는 즐거움, 모든
것이 정상임에도 때로는 원인 모를 공허함까지 회사의 모든 희노애락이 자신에게 녹아있다.
내가 숙명과도 같았던 첫 직장을 나온 건 10년의 경력을 꽉 채우고서였다. 신입사원 때 어리바리하게 복사기 앞에서 헤매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동안 여러 좋은 곳으로 이직했고 당시에는 어렵고, 불편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준 까다로운 상사들에 대해 뒤늦은 감사함을 느끼는 수준까지 성숙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회사는 불안으로 가득했던 내 20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주었고, 거칠고 뾰족했던 껍질을 다듬고 말랑했던 내면을 성숙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30대를 마무리했다. 분명 그곳에서 나는 성장했고, 때로는 상처받았으며, 무엇보다 '베테랑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퇴사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표 한 장이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기분 또는 생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도 아니다.
퇴사 결정을 내린 그날, 묘하게도 하루 종일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차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큰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마치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걸 온몸이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히려 마음은 담담했다. 사실 그동안 그만 두겠다고 여러 번 다짐해서였을까.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걸까. 인생에서 의외로 큰 결정은 우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 모든 일이 계획되로 되지 않으니까.
퇴사 의향을 말씀드리려 팀장님과 면담을 했고, 과정은 매끄러웠다. 조직을 옮기면서 내 능력과 역할이 그들에게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듯했다(는 혼자만의 생각일 뿐). 퇴사일을 받아놓고 홀가분함과 불안 그리고 두려운 감정이 왔다 갔다 했다. 순간 '이제 뭐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곧 마흔이 되는 나이에 창업 아이템이 준비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확신만 있었고, 굶어죽진 않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안정감과 연금까지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한다는 게 무섭기도 했지만, 동시에 해방감도 느꼈다.
그동안 치열했던 삶이 허무하고 별거 아니게 느껴질 때도 있다.
오히려 그만큼 성숙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인정받고 싶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지쳐서 뒤돌아보니, 내가 올라와 있던 계단이 생각보다 높았다. 그때야 비로소 주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 자신에게도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퇴사하고 나니 미래보다는 현재에 살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야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했다. "오늘은 어느 카페에 가볼까?" 하고 맛있는 커피와 분위기 좋은 공간이 있는 커피숍을 검색한다. 평일 오전의 한적한 카페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노트북을 들고 온 프리랜서(통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 같은 메뉴와 같은 루틴이 있다), 여유롭게 신문을 읽는 머리가 희끗한 분들(아마 오랜 직장을 명예롭게 은퇴하시고 여유를 보내시는 듯), 칭얼대거나 혹은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오시는 분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시간의 주인'이 된 기분을 맛봤다.
비교적 사람이 덜 붐비는 평일 오후의 관광지도 가보았다. 주말에만 가득했던 그곳들이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박물관에서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전시물 하나하나를 천천히 감상할 수 있었고, 공원에서는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늦은 점심을 먹거나 때로는 이른 점심을 먹으며, 식당 사장님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요즘 일 없으세요?" 하고 묻는 분들에게 "잠깐 쉬고 있어요"라고 답하며 웃었다. 그 '잠깐'이 언제까지일지는 나도 몰랐지만.
틈틈히 명상도 했다. 회사 다닐 때는 명상이라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하루의 필수 과정이 되었다. 조용한 아침 시간, 15분씩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급한 것이 없다는 게 이렇게 평화로운 일인지 처음 깨달았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대는 오늘 하루 잘 살았는지 스스로 답할 수 있는가.
사실 첫 사랑과도 같았던 첫 회사를 퇴사한다고 하고 밤에는 불안이 몰려와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 있을 때, SNS에서 우연히 본 글 하나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지금껏 잘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될 것이다."
한 간호사가 퇴사하며 자신에게 남긴 다짐이었고, 단순한 문장이었다. 다만 그 안에 담긴 힘이 느껴졌다. 과거를 긍정하고, 현재를 인정하며, 미래를 신뢰하는 완전한 문장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게 이 말을 속삭여보았다. 그리고 조금 비틀어서 나만의 다짐을 만들어보았다.
"나는 지금껏 최선을 다해왔고,
지금 이 순간도 용감하며,
앞으로도 내가 선택한 길을 걸어갈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했던 과거를 인정하고, 불확실함 속에서도 용기를 내는 현재의 나를 격려하며,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감을 다지는 내용이다. 퇴사 후 여러 직장을 지나 지금의 직장에서 곧 2년을 채운다. 퇴사와 이직을 반복하며, 그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 항상 이 다짐을 생각했다.
무너지려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느낄 때마다, 불안할 때마다, 미래가 막막할 때마다 이 문장을 되뇌며 내 인생의 나침반 삼아 마음을 다잡는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돈으로 시간의 질을 바꿀 수 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보내는 시간은 질감부터가 다르다
요즘 취업하기 어려운 시대다. 일하고 싶어도 기회도 없고 요구하는 수준졌다. 한 통계에 따르면 그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더라도 퇴사하는 청년층은 2019년 12.5%에서 2023년 22.5%로 10%p가 상승했다. 입사 1년 이내 퇴사자 비율은 30.6%나 된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방향 설정이 문제일까, 아니면 그저 파랑새 증후군인 걸까.
* 직장 파랑새 증후군은 현재의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직장을 찾아 끊임없이 이직이나 퇴사를 반복하는 심리적 현상
그토록 취업만 시켜주면 영혼을 바치겠다고 했더니, 정말 영혼을 뺏겨버린 걸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원인은 다양하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다만 타인이 설정해 놓은 기준에 맞춰 살아선 안 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고, 그 결과를 오롯이 책임지는 당사자도 본인임을 잊지 말자. 본인 인생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누구든 자신만의 다짐을 갖고 그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믿었으면 좋겠다. 오죽하면 '어떻게든 되겠지'하며 어떻게라도 마음을 가볍게하는 연습을 했으면 한다. 비워야 비로소 채워진다고 하지 않던가. 직장에서든, 일상에서든, 새로운 도전 앞에서든 위축되지 말길.
당신은 지금껏 잘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될 것이니까.
오늘 운수가 좋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새로운 변화의 전조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어긋나는 하루가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는 신호이기도 하니까요.
당신에게도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나요? 그 쉼표 뒤에 어떤 문장을 써내려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