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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Jul 09. 2019

살코기가 더 맛있어요

조금만 더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살은 어디 가고 뼈만 남았냐


목요일 저녁 7시, 집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옆자리에 20대로 보이는 친구들이 잡다한 여행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었다.


'거기 어땠어?'

'야, 너 거기 가봐야 해, 정말... 음 대박, 음식 짱, 숙소 정말 좋아'

'아, 그래? 나도 가봐야겠다. 가고 싶다'


이거 뭐지? 어디지? 그렇게 좋은 곳. 어디인지 얘기 안 해주나? 나도 모르게 궁금해져서 책 읽는 척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훔쳐 들어보기로 했다. 결국 여행지를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곧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하다. 어디일까?


'헐', '대박', '완전', 이 세 단어로 짧고 굵은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사실 우리는 안다. 세세하게 말을 안 해도, 표현이 서툴러도 좋았던 그 맘. 그리고 추천해주고 싶은 배려. 그런데 가끔은 좀 더 설명해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 어떤 점이 좋았는지. 왜 좋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해가 지는 서해의 노을은 그냥 '대박'이 아니라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을 따라 붉은빛이 물들어가며 퍼지는 모습이 아름다워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졌어' 정도만 해줘도 좋을 텐데(내 욕심인가). 

그러면 나도 가슴이 답답할 때면 노을을 찾아 서해 바다로 달려갈 수 있다.


소설의 도입부에 보통 풍경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지루하다. 빨리 주인공을 만나고 사건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는 것은 작가의 상상 공간으로 초대받는 것이다. 작가가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을 안내해준다. 소설에 묘사가 없으면 하얀 공간 안에 서 있는 사람만 보인다. 멜로디 없는 음악이고 나무와 식물이 없는 숲이다.


세상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말은 짧아졌고, 살이 없어졌다.

말에 뼈만 남았다.



분량의 다이어트가 주는 함정


분명 '헐', '대박'은 간 결과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간 절약형 매직 워드다. 모든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에서 그냥 '헐' 한마디면 된다. 깜짝 놀랄만한 일을 보았거나 이익을 보았을 때 '대박'하면 된다. 참 편해졌다. 말이 서툰 사람,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모두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하상욱 님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잘 타고 난 작가다. 그의 저서 <시밤>을 동생이 선물했을 때 시집 치고 분량이 두꺼워 언제 다 읽나 했다. 첫 장을 열어보니 여백이 많았고 1시간도 채 안되어 끝장을 덮었다. 그래도 마음에 뭔가 울림이 남았다. 압축과 응고도 표현의 한 영역이었다. 


요즘 글을 쓰면서 분량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필터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 긴 글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고통을 선사할 수 있다. 바쁜 시간에 그걸 언제 다 읽으란 말이냐. 문장을 줄이고, 단어를 적게 쓰고, 100자 이내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눈으로라도 훑어본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자꾸 분량에 강제 다이어트를 해야 하니 곤욕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필휘지 할 만큼 문장가도 아닌데 말이다. 대부분 칼럼은 1,000자(짧게는 500자 정도)에서 3,000자 이내다. 예전에는 더 길었다. 가만히 앉아서 3,000개의 활자를 스마트폰을 통해 보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크고 짧고 강렬하고 자극적인 문장들만이 독자의 선택을 받는다. 


이 글을 쓰면서 나름 정리한 원칙이 있다. '내 스타일대로 쓰자'이다. 생각의 꼬리가 길어진 날에는 먼지 한 점 없을 때까지 머릿속에서 전부 꺼내고, 반대로 너무 머릿속이 하얀 날에는 짧게 쓴다. 짧게 쓴 날은 공개하지 않고 생각날 때마다 문단을 키운다. 어느 정도 분량이 쌓이고 호흡이 길어지면 그때 발행한다.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글은 분량이 아니라 진심과 진정성으로부터 나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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