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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Aug 01. 2019

필기 예찬

생각의 속도가 빨라졌지만 행복하지 않은 이유

빨라진 세상이 좋긴 해


  세상 참 빨라졌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휴대폰을 펼치고 검색어만 입력하면 되니.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록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다. 라디오를 듣다가, 혹은 TV를 보다가 귀에 쏙 감기는 멜로디가 들리면 꼭 찾아서 들어야 했다. 난 라디오는 다시 들을 수 없고 TV도 다시 보기가 없던 시대에 태어났다. 그 멜로디를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음악을 생각하고 머릿속 카세트 플레이어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했다. 그러다 보면 잊을 만할 즈음에 우연히 잡지나 라디오, 또는 TV에서 제목을 알 수 있었다. 


  길게는 몇 년이 지나서야 그 노래 제목을 알 수 있던 적도 있었다. 다만 조급하지 않았다. 언젠간 알 수 있겠지 하며 다른 음악들을 듣고 다녔다. 세상에 내 취향을 고스란히 담긴 음악은 항상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대부분의 정보를 단 몇 초만에 알 수 있게 되었다. 음악이 궁금하면 앱을 켜면 되고, 생각거리가 있으면 사진을 찍거나 몇 번 타자를 치면 해결되었다. 시간도 절약되고 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바쁘게 사는 모습이 바로 현대인 그 자체 아니었던가. 난 주문에 걸린 듯 시간의 노예가 되어갔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필기를 하는 이유


  어느 날, 책상을 정리하면서 오래전부터 먼지가 소복이 쌓인 필기구들을 보았다. 아직도 잉크량도 많았고 노트 위에서 휙휙 잘 날아다녔다. 오래간만에 하얀 공책을 펼쳐놓고 스윽스윽 써보기로 했다. 항상 의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뭘 써야 할지 몰랐다. 필기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 손이 아파왔다. 글쓰기도 근육이 필요하다는데 근력도 많이 떨어졌다. 간단한 단어 몇 가지만 쓰고 다시 공책을 닫아버렸다. 


  그 날은 이상했다. 아쉬운 감정이 계속 남았다. 일기를 다시 써보기로 했다. 기왕이면 만년필로 쓰고 싶었다. 싸구려 3천 원짜리 만년필을 샀다. 잉크가 번지지 않는 좋은 노트가 있었다. 앞에 10여 페이지만 쓰고 남겨놨지만 예전 회사 선배한테 받은 비싼 노트였다(RHODIA라고 아는가?). 


  막상 시작하니 처음엔 뭘 적을지 몰랐는데, 의외로 쓰고 싶은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만 생각의 속도가 내 필기 속도보다 빨랐다. 손과 속도를 맞추니 글씨는 악필이 되어갔다. 그렇다고 생각의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스마트폰 세대는 단말기 속도가 빨라지면서 생각의 속도는 거기에 비례하여 갔다. 내 기준에 좋은 문장들이 머릿속을 총알과 같이 스쳐 지나갔다. 잘 잡히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한 페이지를 완성하고 나름 뿌듯한 감정이 올라왔다. 캐캐 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하얀 종이 위에 토해낸 듯한 기분이었다. 무거웠던 발걸음에 리듬이 생긴 듯 다소 가벼워졌다. 아직도 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한다. 완전한 문장이 아닌 게 아쉽다. 그럼에도 만년필을 들고 뭐라도 적는다. 만년필을 잡고 꾹꾹 써 내려갈 때 느낌이 좋다.



볼 때마다 설렐 필기구


  대학원 시절, 교수님은 최신 노트북을 사용하고 계셨다. 필기가 되는 랩탑이었다. 주로 프로젝터에 연결해서 필기를 하면서 혹은 필기해온 내용을 보여주면서 수업을 하셨다. PPT 몇 장 만들어서 편하게 하시면 될 텐데 왜 그러시는지 몰랐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은 손에 뭘 잡고 써야 공부가 된다고 하셨다. 지식의 원천은 책과 인터넷에 있을지언정 기억으로 이동하는 건 결국 손이 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김정운 님은 만년필 모으는 게 취미다. 만년필을 갖고 좋은 메모지에 필기하는 행위를 좋아하신다. 집에도 몇 백만 원짜리 만년필도 있단다. 이런 모습을 보고 그의 친구들은 쓸데없는데 돈 낭비한다고 뭐라 한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들에게 한 마디 한단다.


'넌 평생 몇 백 원짜리 볼펜만 쓰다 죽어라!'


  저주라면 저주고, 악담이라면 악담이고, 충고라면 충고다. 나도 내 이니셜이 새겨진 만년필 하나 갖고 싶다. 결재 서류에 가슴속 만년필을 꺼내 멋지게 서명하는 게 꿈이다. 서명하고 상대가 보이도록 잠시 놓아두는 겉멋도 부리고 싶다. 


  볼 때마다 설레는 필기구를 사두면 뭐라도 마구마구 쓰고 싶어 진다. 그러다 보면 다소 불안했던 감정이 괜찮아진다. 인간은 불안하고 괴로운 감정이 들 때 글을 쓴다고 한다. 맞다. 글쓰기는 치유의 행위다. 내가 기쁘고 행복할 시기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머리가 무거운 날이면 펜을 들고 글을 쓰자. 커피 한 잔과 구름이 함께 있는데 쓸 문장이 없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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