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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Aug 23. 2016

#01 <공부>

공부, 언제 끝나?

01 | 이성과 감정은 공존하지 않는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여름방학에 연구 동아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문득 공부가 좀 더 하고 싶었다. 하고 있던 공부가 재미있었던 시기였다. 이 열정을 이어가고자 취업을 2년 유예하기로 했다. 어려운 취업시장에서 시간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졸업 후 회사와 공부를 병행하기 힘들 거라고 지도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내 결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방대 출신으로 이력서에 한 줄 더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고민하지 않고 전자공학 석사 과정을 지원했다. 그때는 목표만 보았고, 수학적 기초 배경은 아직 포기 수준은 아니라고 믿었다. 한 마디로 자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시간은 머리와 체력의 진흙탕 싸움이었다. 대학원 공부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속았다. 석사 3학기로 넘어갈 무렵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다. 실험 결과는 뒤죽박죽이고, 논문은 써야 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 확신 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나의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불안감까지 찾아와 머리를 식히러 밖에 나가 커피를 마시는 일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밤에 잠은 안 오고 뜬 눈으로 지새운 채로 연구실에 나오는 일상을 반복하였다. 결국 우울증이 찾아왔다. '끝내야겠다'는 나 스스로의 강박증과 30살이 지나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잉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조급증 만들어낸 결과였다. 삶은 너덜너덜 해졌고, 난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무기력한 나날을 반복하다가 다 내려놓고 잠시 휴식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 이성과 감정이 드디어 전쟁을 잠시 접고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주중엔 정해진 시간에 연구실을 나와 운동도 하고, 주말엔 여행도 다니고, 나에게 최대한 많은 휴식을 주려 노력했다.

내가 조급해질 즈음이면, 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괜찮아, 지금 안 해도 되고, 그건 게으름이 아니야. 휴식이라고 하는 거야'. 전공 서적 외에 좋아하는 책도 읽고, 부드러운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내가 행복을 느끼는 일들을 감정이 이끄는 대로 맡겨봤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삶은 미련 덩어리라 느껴질 때 부끄럽게 손을 내밀어주는 것 같다. 고민을 줄이고 공부 그 자체를 즐겨볼까 하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의 새싹이 살짝 돋아났다. 잠시 떨어져 있으니 그리워졌다. 그동안 이해가 안 가던 수식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공부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논문을 완성했고, 원하던 기업에 취업도 했다. 박사는 안 하기로 했다. 너무 힘들었고,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02 | 이만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뜨거운 여름날의 기억과도 같던 공부를 끝내고 20대의 끝자락에 취업을 했을 때, 이제 그만하면 될 줄 알았다. 대학교를 마치고 나온 후 또 다른 사회 공부의 연속이었다. 다만 답안지가 따로 없을 뿐이었다. 내가 답을 만들어가야 하는 부담감이 컸다. 20대에 지겹도록 답을 체크하며 연습을 했지만, 30대부터는 내가 그 답을 만들어가야 했다. 하나를 끝내면, 미처 보람을 느끼기도 전에 또 다른 숙제가 던져졌다. 게임에서는 중간보스를 물리치면 업그레이드된 조무래기들이 덤비고, 한 챕터 씩 지나다 보면 최종 보스를 만난다. 참 일관성 있고 합리적이고 선형적이다. 그러나 인생은 실전이다. 회사와 주변에서 내주는 숙제들은 단검 하나 찬 쪼랩이 내가 물리치기에 너무 벅찼다. 게임에선 그래도 약물이나 무기 향상 아이템을 주기라도 하지만, 현실세계에선 그런 거 없었다. 다만 퇴근 후 동료들과 울분을 토하며 부어라 마시는 술자리만이 유일한 힐링 아이템이었다.  

공부란 보이지 않는 최종 보스를 만나러 가는 여정
 
 



03 | 정답도 점수도 없는 과목을 공부 중 입니다만


서른 살을 기준으로 이전의 공부란 것은 내 선택이긴 했지만 언제까지나 취업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지침서'정도였다. 사회에 첫걸음을 내디딘 후로 공부에 대한 개념이 약간 달랐다. 정답이 없다. 내가 만들어 가야 한다. 새로운 분야에 항상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알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행위. 물질적 여유가 그나마 풍부해진 30대에 제대로 된 공부 습관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책상에서 머리를 부여잡으며 책과 씨름하는 수준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책도 찾아보고 인터넷을 뒤지며, 잘 아는 사람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나만의 답을 만들어야 했다. 정답이 없기에 제한시간이 없어 이것 하나는 좋다.


30대 중반의 어찌 보면 늦은 나이에 나는 요즘 롱보드를 탄다. 이것도 공부다. 체육과목이다. 중간고사도 봐야 하고 기말고사도 봐야 한다. 이 과목에서 만점을 받으면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다. 바람을 맞으며 바퀴를 굴리고 보드 위에서 이것저것 자잘한 묘기를 부려본다. 사람마다 적성이 있지만 자주 넘어지는 거 보면 이 과목은 아주 오랜 시간 후에 중간고사를 치를 거 같다. 그래도 포기를 못 하는 이유가 있다. 조금씩 진전이 있다. 다행이다. 별거 아닌데 희열이 느껴진다. 마치 마약과 같다. 기분 좋은 마약. 내일 또 타고 싶어 진다. 

근데, 왜 난 푸시오프가 잘 안될까?
 
 



04 | 이거 계속해 볼까요


요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전공 분야의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퇴사했다). 매너리즘이라고 하나. 아무런 의미를 느낄 수 없다. 그저 과거의 지식을 주머니 속에서 꺼내기만 할 뿐.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잠시 멈추고 또 다른 공부를 해볼까 한다. 비록 당장 수입이 없다는 큰 문제가 있어서 망설여지긴 하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덩달아 공부할 내용도 많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나 스스로 뭔가 찾아서 할 수 있다는 게. 


공부의 맺음말은 ‘더 해야 하는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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