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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Sep 13. 2019

걷는데 따로 이유가 있나요?

<걷는 사람, 하정우> 



남아일언 중천금이란 말 한마디에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떠난 남자


  여기 말 한마디 잘못해서 국토 대장정을 떠난 이가 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지만 농담 같은 말 한마디를 직접 실행에 옮긴 남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기는커녕 577km의 천릿길을 떠난 사람이다. 2011년 대한민국 백상 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상 연기자' 시상자로 나온 하 배우님은 바로 이전 해에 <국가대표>로 이 상을 수상했다. 다시 <황해>로 수상 후보자로 지명되자 연속 수상은 안될 거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선을 넘는 농담을 해버렸다. 만일 본인이 수상하면 국토대장정을 떠나겠다는 것. 말이 씨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열매가 되어 돌아왔다. 그 해 백상 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상 연기자'는 하. 정. 우. 였다.


  이후 그의 행보가 참 인상적이다. <577 프로젝트>라는 국토대장정 기행기를 영화로 담아냈다. 이 영화는 단순하다. 주야장천 걷기만 한다. 남들보다 조금 더 발이 크고 튼튼한 두 다리를 가졌다는 인간 하정우 님은 정말이지 묵묵히 잘 걷는다. 그의 농담은 걷기에 따라나선 그의 선배와 후배 동료들의 땀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시원하고 상쾌함을 주곤 한다. 


p.127..
밥은 잘 먹었는지, 소화는 다 되었는지 확실히 재판을 받은 후에야 편안하게 출발할 수 있다. 걷다가 길거리에서 재판 신청이 들어오면 난감하니까...(중략).. 그런 단어들이 우리에게는 참 많다..(중략).. 우리가 쓰면서도 자꾸 웃게 되는 말들, 웃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단어들이 아닌데도, 돌아보면 우리끼리 쓰는 즐거운 암호와 농담으로 인해 관계가 더 돈독해진다.


몸을 일으키기만 해도 할 수 있는 운동


  아침의 해가 앞당겨진 어느 날, 아침 6시. 낮은 길어졌고 밤은 짧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눈을 간지럽히던 아침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잠자리 구석으로 파고들었겠지만 그 날은 달랐다. 멍하니 잠시 밖을 바라보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새벽녘에 잠시 내린 비가 사방에 흩어져있었다. 운동화 끈을 묶고 아직 차가운 공기를 헤치며 묵묵히 걸어간다. 목적지도 없다. 다리가 뻐근해질 즈음이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잠시 일찍 나온 사람들만 출근을 재촉했을 뿐 주변은 고요했다. 대지가 기지개를 펴기 전의 주변을 감싸는 고요한 기운이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잠시 고민과 잡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내 마음속 세 살 아이의 울음을 잠시 달랠 수 있었다. 이 날 이후 지친 마음이 들고 머릿속이 무거울 때면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걸었다. 좁은 범위의 휴식, 삶에 뿌리를 다지는 작은 의식이라고 할까.


p.35
..(중략)..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중략).. 나의 기분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p.155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조금씩 달래고 설득해 일단 누운 자리 밖으로 끌어낸다.


새벽에 내린 비가 잡초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걷기가 주는 교훈


  길거리를 다니는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일반 어른들과 확실히 다른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짧은 거리라도 이 친구들은 '뛰어다닌다'. 나이를 먹을수록 뛸 일이 줄어든다. 그만큼 시간에 대해 관대 해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나이에 어린아이들처럼 뛰려고 하는 것 자체가 시간을 역행하려는 의지로 비칠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른 신체조건을 갖고 있고 거기에 맞는 운동법이 있을 것이다. 예전엔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되는 줄도 모르고 뛰면 살이 빠진다는 소리에 참 많이도 달렸다. 그런데 요즘엔 걷는 게 좋다. 


  약간 빠른 보폭으로 내 시야를 넓게 돌리며 소소한 일상을 스치듯 감상하는 일이 즐겁다. 비가 왔거나 많이 걷지 못한 날이 있으면 그다음 날 더 많이 걸으려 무리를 한다. 그러면 꼭 온몸이 욱신거린다. 기분도 좋지 않고 일상이 무너진 듯한 자괴감도 든다. 좋자고 한일이 조급함이 망쳐버렸다. 걷기는 이런 조급함으로부터 유연할 수 있는 뚝심을 길러준다.


p.120
그런데 초반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초조함에 짓눌리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빨리 성과를 내고 싶다. 요행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중략).. 내가 걷기를 통해 내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 배우님은 걷기 학교 교장입니다


  이 책은 걷는 것 만으로 배우라는 인생의 어두운 면을 묵묵히 이겨내고 삶의 뿌리를 단단히 다지며 그동안 그만의 생각과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책 속에 녹아든 그만의 농담 세계에 속하고 싶다. 나도 하루 최소 1만보 이상을 걷고 있다. 처음엔 한 발 내딛는게 어려웠다. 이젠 그런 날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1시간 산책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이 습관은 꾸준히 유지할 계획이다. 아직 겨울이 멀었지만 아마 그 때는 두꺼운 파카를 입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흥얼거리며 천천히 내 주변 세상을 탐색할 거 같다.


현재 그는 '하정우의 걷기 학교'의 교장으로 재임 중이다(유튜브 걷기학교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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