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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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더워야지. 겨울에는 춥고. 그게 섭리 아냐?
아니지, 인간이라면 무릇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 거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를 한껏 욕심을 내야 하는 거지. 너는 여전히 겨울을 좋아하려나? 혼자가 되기에 겨울만한 시간은 없다고 말했으니까. 참나, 여자친구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물론 그런 점이 너를 대체 불가로 만든 거지만 말야.
이런 거, 중요한 내용인가? 애인은 선택하는 데 있어 대체가 가능한지, 뭐 그런 거. 주변을 보면 심심찮게 그런 말들이 들리긴 해. 나는 네가 너라서 좋아, 너 그 자체로 좋아……. 그치만 믿을 수가 없는걸. 그래 놓고 다들 손쉽게 다른 사람과도 만나버릴 것 아냐? 하긴,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또 대체가좀 되면 어때? 그저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지.
그 때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여름을 좋아하나봐. 여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겨울이 되니 확실히 알겠어. 이런 멍청한 사람! 그러니 그리스의 지중해까지 와서 조금이나마 여름의 냄새를 맡으려 킁킁대고 있지. 여름이 되면 또 겨울을 그리워하려나? 아냐, 난 정말 여름이 좋아. 정말이야.
여름이 되면 그리스에 한 번 더 오고 싶어. 지금 같은 계절에 수영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바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꿈틀대는 게 느껴지거든. 배를 타고 에게 해의 크고작은 섬들을 한 바퀴 돌고 왔어. 이런 곳이야말로 신화가 깃들기 알맞은 장소구나, 싶더라. 크레타 섬이라고 알아?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탄생한 곳이야.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직접 잘라내고 쫓아냈는데, 그 때 우라노스가 하늘로 달아나며 저주를 내렸대. ‘너도 네 자식의 손에 쫓겨나고야 말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크로노스는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모조리 삼켜버렸고, 그의 아내이자 누이인 레아는 결국 크레타 섬으로 내려와 제우스를 몰래 낳았지. 나는 크레타 섬의 핑크 비치에 앉아 한 아저씨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어. 그리고는 제우스는 아무래도 참 아름다운 곳에서 나고 자란 것 같다고 생각했어.
신화가 참 재밌지, 어떻게 이런 이야길 그 시대에 생각했을까. 저주가 두려워 도망쳤더니 도착한 곳은 바로 그 저주 안쪽이라니. 이거야말로 어쩌면 모든 인간을 형상화한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평생을 도망만 치는데도 결국엔 그 손아귀 위에 있는……. 그럼 좀 웃기지. 대체 다들 무슨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나, 여행이라는 핑계로 도망치고 있는 건데. 그렇다면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걸까. 오늘 핑크 비치에 앉은 저 금발의 남녀와, 저 단란한 터키인 가족과 이 이야기를 건네 준 섬에 사는 아저씨, 그리고 웃지 않는 이 동양인 여자. 우리는 모두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고, 또 그럼에도 결국엔 무엇으로 돌아가고 마는 걸까. 그리스인들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왜 이 이야기를 낳았지? 나는 우선 그들의 저주를 집어삼켜서 없애버리고 싶어.
2019.1.27
물에 들어가기 오 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