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오지 않는다

불행 옆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by 이여진

8


“오늘 어디 가요?”

“응, 미연 씨랑 밥 먹기로 했거든.”


출근을 준비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를 송주가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미연 씨는 한껏 다정한 모양새로 나를 챙겨줬던 키가 작은 간호사의 이름입니다. 퇴원할 적에 나는 그녀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물었습니다. 정확히 일주일을 채워 병실에서 지낸 뒤였습니다. 사실 나는 미연 씨 뿐만 아니라 옆자리 아주머니도, 또 그 앞 자리의 종종 이야기를 나누던 골프를 친다는 고등학생에게도 번호를 물어봤습니다. 퇴원하기 직전의 나는 어쩐지 그런 상태였습니다. 누구에게라도 말을 붙이고, 또 누구와도 연결되고 싶은 그런. 그리고는 아직 왼팔의 깁스가 조금 불편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잘 다녀와요.”


송주는 뒤돌아 TV를 쳐다보며 말했는데, 분명 웃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약속이 생겼다고 좋아하다니, 정말로 엄마 노릇이라도 하려는 모양입니다.


미연 씨는 올해 스물여섯으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병원에서 곧바로 일하기 시작한 데다가 돈을 모으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아주 단단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직업적인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그녀가 좋았습니다. 절약을 즐기는 성향도, 그녀의 단정한 외관과 대비되는 가끔씩 보이는 깡패 같은 어록들도 그리고 꽤나 가깝지만서도 서로 존대를 하는 우리의 요상한 관계도 모두 맘에 듭니다. 또 우리는 입맛이 잘 맞아서, 양식이나 일식 대신 종로 5가의 포장마차 앞에서 보자고 하는 미연의 말도 나는 재밌었습니다. 문제가 하나 있긴 있었지만요.


“아니,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니 웬 포장마차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환자 분은 드시면 안 되죠. 근데 저는 환자가 아닌데요? 안주랑 보리차랑 같이 드세요. 제가 원하는 거 사준다고 하셔 놓고 왜 투덜대시나?”


나는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지으며 포장마차 안쪽을 바라봤습니다. 다들 얼굴이 조금씩 뜨겁고 발그레한 상태였어요. 모두들 웃고 있는 게, 고민이나 문제 같은 건 반입금지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미안해요, 환자 분. 제가 오늘 너무 술을 마시고 싶어서 그래요. 내일이 마침 비번이라 오늘 아니면 안 돼요. 진짜 안 돼.”

“그래, 그래. 알겠어요. 들어가요.”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 틈에서 그들과 섞일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요 즈음 일이 어떻고, 또 어떻게 해야 집을 살 수 있을지와 같은 얘기들 말입니다. 나는 그게 좋았습니다. 가만히 웃고 있는데 미연 씨가 문득 물었습니다.


“언니는 왜 결혼 생각이 없어요?”

“제가요?”

“네. 이유가 뭐예요?”

“저, 계획이 없는 건 아닌데?”

“아, 뭐야. 정순 아주머니가 언니 결혼 생각 없다고 하시던데. 아니었어요?”


아마 아주머니는 병원 전체와 담소를 나눴나 봅니다. 나는 신나서 떠드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다시금 떠올리며 웃었습니다.


“생각이 없진 않은데 그렇다고 막 의욕이 있는 것도 아닌, 뭐 그런 상태죠.”

“그럼 내 얘기 좀 들어 봐요, 언니. 나는 진짜 모르겠어요.”


나는 그제서야 미연 씨가 굳이 포장마차로 와서 술을 마시자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술과 연애는 분명 다른 단어지만 결합되면 특별한 맛이 나는 겁니다. 미연 씨는 십 분 정도 본인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디서 만났고, MBTI가 무엇이며 어떤 성향인지에 대해서요. 그리고는 곧바로 투정을 시작했습니다.


“벌써 2년 반 째 연애 중인데, 왜 항상 나만 뭔가를 요구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연락도 그래, 뭔가 먼저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그래. 심지어 이 남자는 결혼 생각도 없어 보여요.”

“결혼이 하고 싶어요?”


미연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더니, 짧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왜요?”


생각보다 긴 침묵. 나는 미연 씨의 이목구비를 훑었고, 미연 씨는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날 보다가는 술잔을 내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그야, 하나가 되고 싶으니까요. 안심이 되니까.”

“안심이 돼요?”

“안심이 되죠. 선언하는 거잖아요. 우리는 공식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대부분 그렇죠. 왜 사람들이 연애할 때는 ‘우리 연애해요’ 라고 말하고, 결혼할 때는 ‘우리 결혼했어요’ 라고 말하는지 알아요?”

“글쎄요.”


“결혼 앞에서는 다들 영원을 믿는 거예요. 결혼했으니 이제 끝이라는 거라구요. 그러니 종착점처럼 생각하는 거죠. 우리 연애했어요, 이런 게 어딨어요. 다음 연애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건데. 연애보다 결혼이 훨씬 무거운 거잖아요.”

“네, 그런 것도 같아요.”


나는 놀랍다는 듯 미연 씨의 동그란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고, 미연 씨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 날 바라봤습니다. 나는 그렇게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미연 씨의 능력이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깊이 들어가는 것은 저주입니다. 뭐가 됐든 그래요.


“아무튼 나는 연애만 하면 이래요. 늘 훨씬 더 좋아해서 안달이 나고, 서운하고. 더 좋아하면 언제나 구질구질하고 처절해져요. 알아요?”

“좋은 거 아니에요?”

“뭐가 좋아요. 늘 매달리고 전전긍긍하잖아요.”

“그래도요. 더 좋아하는 쪽이 결국 이기는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자신없이 내 주황색 단화를 내려보며 말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뭔가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믿지 않을 거예요. 미연 씨도 셔츠 단추를 하나 풀더니 마찬가지인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요?”

“그게, 장기적으로 보면……. 아무튼 더 좋아한 사람이 더 슬픈 건 당연한 거 아녜요? 대신 즐거운 순간에 상대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더 슬플 것도 그 사람만의 특권이죠.”

“언니, 이전 연애 얘기 해 주면 안 돼요?”


미연 씨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습니다. 대체 그동안 뭘 해온 거냐는 듯한 뉘앙스였어요. 나는 쭈뼛대다가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낡은 곳으로부터 꺼냈습니다. 그 때부터 아마 나는 술을 조금씩 마셨고(미연 씨는 간호사로서는 꽝인 셈입니다), 우린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내 평소 주량의 절반도 마시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대고 자꾸만 어지러웠습니다. 그래, 세상이 말하는 연애라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닌데.


나는 미연 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어요. 오히려 미연 씨에게는 송주보다 훨씬 상세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하시려나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털어놓지 못하는 구석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그 억눌린 말들. 내가 왜 그 때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아?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불쌍하고 소극적이었는지 알아? 우리가 왜 아직까지도 서로를 바보라고 생각하는지 알아? 내가 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알아? 이 병신새끼. 병신 같은 새끼들. 이제와 뭔가 해보려고 해도, 씨발, 왜 이제와서. 지금도 외면해버리면 난 아직 똑같은 거야. 날카로운 단어들이 밤을 난도질해버릴 것처럼 한가득 입에서 튀어나와 포장마차 안쪽을 채웠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택시 안이었습니다. 기사님은 대체 병운이란 사람이 누구고 그의 집이란 게 어딜 말하는 거냐고 계속해서 물었지만, 나는 일단 가자고, 제발 어디로든 좀 가자고 말썽을 피웠습니다. 문득 메세지로 받은 병운의 집 주소가 떠올라 보여드리니, 기사님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조용히 달렸습니다. 빠른 속도로 병운에게 달려가는 도중에도 나는 그에게 간다고, 드디어 그에게 가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이번이야말로 꼭 그 사람에게 가는 거야. 그와 좀더 이기적인 대화를 나눠야지. 단어들을 있어야만 하는 자리 말고, 있었으면 하는 자리로 보내버려야지.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사랑처럼 안 보이는 사랑을 내뱉어버리고 돌아와야지. 그 대단하다는 사랑이란 걸. 술을 조금만 마시고도 정신이 나가버릴 수 있다는 건 신기한 일입니다.


그의 집 앞 골목은 엄청나게 어둡고 조용했고, 또 공기가 약간 눅눅했습니다. 나는 사 월답지 않은 공기를 양껏 들이마시고 주택 계단을 올랐어요. 문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혹시나 여기가 아닐까, 하며 귀를 가져다 들이밀었습니다. 그렇게 사 층의 낡은 철문 앞에 선 나는 어쩐지 아픈 가슴께를 만지작거리면서 두 번의 노크를 울렸습니다.


쿵, 쿵.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모난 모양으로 노랗게 변색된 초인종 버튼을 누르고는, 다시 한 번 가운뎃손가락으로 철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벌써 열두시가 다 되어가는데, 이 시들어가는 남자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평소였으면 그대로 돌아갔을 텐데, 어쩐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아니지. 평소였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온순하게 굴 필요가 전혀 없어요. 나는 도어락의 뚜껑을 거칠게 위로 밀어올렸습니다. 미친 짓이에요.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못 하겠죠. 조금 웃기지만, 나는 공—칠—이—팔 을 순서대로 천천히 눌렀습니다.


삐—삐—


우스운 일입니다. 그럴 리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내 생일을 막무가내로 눌러 놓고는, 어쩐지 시무룩해지는 것 말예요. 그럼 또 뭐가 있을까요. 일공공오? 병운의 생일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도어락은 야속하고 불쾌한 전자음 두번만을 삐삐 거리며 내뱉었어요. 남은 기회가 얼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길로 공—일—공—팔 을 순서대로 눌렀습니다.


삐리릭—


흡! 하고 나는 숨을 참았습니다. 일 월 팔 일은 아시다시피 병운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선생님의 기일입니다. 정말 열릴 줄 몰랐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아직도 이 번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어떤 아픔이 있었어요. 나는 두꺼운 문을 조심스레 잡아당겼습니다. 끼익— 하는 소리가 크게 나는 바람에 자연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습니다. 안쪽은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언제나 밤이었던 것처럼 깜깜한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현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신발들 사이로 내 주황색 신발을 벗어 두었습니다. 가로등과 똑같은 빛을 내는 신발.


“아!”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나는 발끝에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쓰러졌습니다. 무슨 딱딱한 게 바닥에 굴러다니는데, 앞이 보이질 않으니 알 수가 없었어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빛을 밝혔습니다. 물건의 윤곽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글자들. 책이 다섯 권쯤 비스듬히 쌓여 있었습니다. 우주의 구조, 초끈이론의 진실, 코스모스…….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집은 방 두 개에 화장실이 하나, 그리고 넓은 거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렵사리 거실 앞쪽으로 걸어가 형광등 스위치로 보이는 무언가를 눌렀습니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게 내 눈을 가득 찌르고, 나는 눈을 찡그리며 감았다 천천히 다시 떴습니다.


장담컨대 나는 살면서 그렇게 기괴한 방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방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살인 현장이라거나 끔찍한 사고가 벌어진 장소를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겁니다. 바닥에는 온통 식기와 책들, 그리고 옷가지들이 뒤집힌 채 널려 발을 내딛기 전에 어디를 밟을지 눈으로 미리 파악해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또 방의 한 쪽과 반대쪽 면이 어딘가 뒤틀리고 꼬여 언제라도 맞닿을 수 있을 듯한 느낌에다, 책장은 듬성듬성 채워져 있고 회색 벽지는 곳곳이 시커멓게 바래져 피를 흘리는 것처럼 끙끙 앓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물건들을 벽에다가 던져 댄 듯 했어요. 아무리 돌아봐도 건축물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형상입니다. 방의 공기는 온통 끈적이고 축축해, 온 방이 죽기 직전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처럼 나를 조여댔습니다. 이런 곳에 살다가는, 아니 이런 곳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방과 함께 썩어들어갈 게 분명했어요. 나는 병운이 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건지, 또 나를 만났을 때 보인 모습은 또 얼마나 노력하여 꾸며낸 모습인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침실인 듯 보이는 방의 문이 게슴츠레 열려 있고, 그 안쪽으로 비슷한 회색 벽지에 커다란 침대가 보였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밟을 곳을 살피며 방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침실 안쪽은 나에게 또다른 공포를 주었는데, 안쪽은 벽면이 온통 새하얀 데다가 나무랄 데 없이 깨끗하고 반짝거렸습니다. 흰 옷장은 적절한 광택감으로 각이 진 채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검은색 시트의 킹 사이즈의 침대가 정확히 정돈되어 있는 데다 원목으로 된 커다란 테이블이 옷장과 침대 사이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올려져 이 곳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 곳을 대체 누가 저 거실과 같은 집이라고 생각할까요. 등에 쥐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오싹했습니다. 두 명의 다른 사람이 살지 않는 이상, 이렇게 고집스레 두 공간을 분리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상해요.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방을 한 바퀴 돌고는 창문에 쳐져 있는 커튼을 걷었습니다. 멋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의 시원함이 있는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집에 비해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였어요. 다행입니다. 다행…….


다행?


대체 뭐가? 또 난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비밀스레 남의 집을 훔쳐보는 범죄를 저질러서 대체 뭘 얻고 싶은 걸까. 이건 아닙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요. 술독에 집어넣은 머리를 갑자기 빼낸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커튼을 다시 단단히 쳐 놓고 몸을 돌렸습니다. 탈출해야 해. 어서, 병운이 돌아오기 전에 흔적을 모두 지우고…….


그 때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빨간색 노트였습니다. 새빨간 노트, 정말 새빨간 노트. 그건 검은색 베개보다 더 위쪽으로, 원목으로 만들어진 듯한 침대 프레임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표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게 무언가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야 잘 때 머리맡에 두는 유일한 무언가라면, 그건 꿈까지 들어와도 무방하다는 약속이니까요. 나는 홀린 듯 침대로 다시 걸어가 그 노트를 집어들었고, 큰 모니터 앞에 앉아 조심스레 펼쳐들었습니다.


2022. 4. 9


그만.

행복이나 청춘, 낭만, 사랑 같이 약해빠진 단어들은 그만 쓰레기통으로 가는 편이 좋다. 더는 내게 도움되지 않아. 하지만 쓰레기통을 뒤지는 건 사실 내 더러운 취미 중 하나.

끝이란 건 어쩌면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2022. 5. 16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은 쓸모가 없다. 애정마저도 주 5일제로 토해내던 나의 입술, 뜨거운 한숨을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소거하는 선주의 입술. 모두 각자의 역할이란 게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자꾸 야위어만 간다. 같은 길을 걸어내며 누군가는 오늘 이별을 상상했겠지. 정기적인 급여가 사라진 지 벌써 세 달이 가까워져 간다. 선주는 오늘도 열두 시간씩 일해 놓고, 내게 괜찮다고 말한다. 그치만 어제보다 깊게 패인 그녀의 주름만큼 나는 못난 놈인 거다. 미안해. 이건 분명히 네가 작년에 상상한 결혼이란 그림이 아닐 텐데.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을 구해야 한다. 안정적인 일.


좀더 참았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만 더 뻔뻔했다면, 김정규 씨를 그대로 무시할 수만 있었다면 이렇게 처참하게 굴러다니지 않을 텐데. 그치만 자꾸 회사가 약아빠진 짓거리를 하잖아. 우리는 분명 어른이잖아.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개를 흔들면서 흐릿하게 바라봐야만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게, 그게 이상한 거잖아. 아냐, 아냐. 전부 내가 잘못한 거야. 사회가 인간을 닮았다고 믿어버린 거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전부 인간을 닮아있는 건 아닌 건데. 인간이라고 전부 인간을 닮아있는 건 아닌 건데. 와중에 정말로 인간을 닮아버린 나는 불행하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도 나를 좀더 믿어 주면 좋을 텐데. 나는 분명 새롭게 일어날 수 있다. 그저 지금은 돈이 조금 부족할 뿐이야. 전부 세어 보면 살아가는 데 있어 만남보다 이별의 갯수가 두 개 정도 더 많을 것. 슬픈 일이다. 길을 걸으면 사람들은 묻는다. 오늘이 이렇게 끝나도 괜찮아요? 괜찮은 거예요? 정말? 생명체의 등과 배를 구분하려면 어느 쪽이 쓸쓸한 모양새인지 확인하면 된다. 나는 사방이 껍질로 덮인 거북이다. 부인은 밤마다 쓸모가 없어진 남편을 제거하는 영웅담을 상상한다. 나의 역할은 그제서야 생기는 것도 같다.



첫 페이지에 적힌 것은 그게 전부였습니다. 나는 손을 살짝 떨며 다음 페이지로 종이를 넘겼습니다.



2022. 5. 18


어쩌자는 건데. 진실은 내가 회사에서 쫓겨났다는 거다. 아무리 제 발로 나왔다고 변명해도 실상은 쫓겨난 거다. 똑바로 봐야 한다. 우린 최면에 걸린 것처럼 아내와 남편이라는 직책을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결혼이란 게 도대체 뭔데. 나는 선주를 지독하게 좋아한다. 그러니 좀더 신중했어야 했다. 다행히 우린 아기가 없다. 그거야말로 행운이다— 이딴 말을 지껄이는 내게 부어버릴 수 있는 혐오보다 더 뜨겁게 끓는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나는 온 몸에 진실이란 화상을 입었다. 안쪽부터 녹아내리고 있다. 나는 진실을 지독하게 좋아한다. 진실을 숭배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실이란 건 천사보단 악마 쪽에 가깝다. 사회도 똑같고 그 사랑이란 하잘없는 것도 똑같다.


2022. 6. 3


첫 번째 상담. 몇 개의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 늙은 의사는 해가 지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런 가설을 쓴다. 그게 대체 무슨 이상한 말인가 싶지만 그렇다고 문제될 건 없다. 감정이란 건 그냥 있는 대로 주워 쓰면 된다. 그 중엔 오히려 쓸모없는 것들이 더 많다. 내가 질투심 같은 걸 못 느낀다고 해서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건데. 하지만 질투심 없이도 혐오나 애정 같은 걸 지켜낼 수 있을까? 그런 건 잘 모르겠어.


2022. 6. 7


문래동에 작은 카페 자리를 하나 계약했다. 원래도 커피에 관심이 많고 운영하는 법도 이것저것 공부했으니, 나름의 미래가 있다. 원두는 직접 맛있다고 느낀 로스터리로부터 구입해서 사용하고, 여유가 생기면 직접 로스팅도 해볼 생각이다. 월급쟁이가 되어 쥐꼬리도 안 되는 돈에 발발 떠는 건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에스프레소 머신과 여러 장비들을 근처에서 중고로 구매했다. 물건을 가지러 가 왜 파는지 물어보니, 화곡동에 카페를 열었다가 이번에 폐업한단다. 폐업의 이유를 묻기엔 몰골이 너무 수척했다. 뭐가 되었든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 거다. 나는 내 모든 걸 걸 작정이다. 잠깐은 잘 안 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자신있다. 끝까지 갈 작정이다.


2022. 6. 15


꿈에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내게 잘 했다고 말한다. 그깟 회사야 다시 들어가면 그만인 거라고. 그런 걸 한두 번 눈감고 살기 시작하면 끝인 거라고. 화가 많이 났다. 그 말씀대로 행동한 댓가로 아들이 지금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시냐고. 대체 아들이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삼켜내고 있는지. 하루에도 수백 번씩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벽에다가 머리를 박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계신 게 맞냐고.


2022. 6. 20


세 번째 상담. 의사는 내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특히나 감정이 일렁이는 문제는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걱정할 게 없단다. 나도 동의한다. 모든 게 순조롭다. 카페는 다음 달이면 오픈을 앞두고 있다. 선주도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 지긋지긋한 회계 업무보다야 나와 함께 카페를 운영하는 게 좀더 즐거울 거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직원을 구해야 하나 망설이던 차에, 잘 되었다 싶다. 문래동의 골목은 회사가 많아 평일 점심이나 저녁에도 사람이 꽤 되고, 주말에도 놀러 나온 사람들로 유동인구가 꽤나 많다. 걱정은 없다. 어제는 오랜만에 술도 없이 일찍 잠들었다.


2022. 7. 18


카페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평일의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점심에 몰린다. 식사 시간 이외에 조금 한산한 느낌은 있지만, 아직 초창기니 내가 노력해야 할 문제다. 아내는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우리는 함께 출퇴근할 때 눈이 마주치면 웃는다. 그걸로 됐다.


2022. 9. 20


바쁘면 좋은 거다.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어쩐지 가게를 연 뒤로 바쁘면 문제고 안 바쁘면 더욱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나 하나면 상관없지만 선주는, 선주는 원래도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좀더 쉬게 두고 싶지만 나의 업무는 이미 포화 상태까지 왔다. 잠을 좀더 줄이면 되려나. 그치만 세 시간도 못 자는 사람이 실수 없이 일할 수 있나? 직원을 더 뽑는 건 안 된다. 아직은 안 된다. 궤도에 들어서면…….


2022. 10. 15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박 과장님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그들은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다가, 편육을 집어드는 내 옆자리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얼굴을 맞대고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한눈에 알아봤다. 내가 요 즈음 지독하게 지쳐 있고, 또 지독하게 외롭지 않냐고.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지속되어야 하는지, 이런 불안이 대체 언제까지 이어지는지 답답해 죽어버릴 것 같은 나의 속내를 한 번에 맞췄다. 그들 말마따나 내 인간관계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친구들이 내 가슴팍만한 돌님을 흔쾌히 하나 내어주었다. 돌님에게는 연민이란 게 있다고 한다. 인간에게 모자란 것들을 내어주신다고 한다. 거실 한가운데 두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것도 같다.


2022. 12. 25


회사를 다니는 것의 장점은, 휴일을 남이 부여한다는 거다. 우리에겐 주말은커녕 휴일이라 부를 만한 것도 이제는 없다. 쉬어서는 안 된다. 아니, 휴일을 부여받는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이 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가게가 쉬면 우리 가족과 가족의 미래가 전부 쉬는 거다. 크리스마스엔 사람들이 거리로 많이 나온다. 이런 날을 놓칠 수는 없다.

선주는 오늘 아침에도 웃었지만 나는 그 눈매와 입가에 패이는 주름의 갯수를 세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기다리면…… 전부 나아질 거야. 오늘만 어찌저찌 견뎌내다 보면 모두 괜찮아질 거야. 선주는 유독 가게에서 더욱 야윈 것처럼 보인다. 일하는 사람이란 건 원래 이렇게 애틋한 걸지도 모른다. 열 시가 되어 가게 문을 닫고 우리는 직접 만든 한 조각 케잌에다 불을 붙였다. 불은 조용히 타오르고, 선주는 눈물로 불을 껐다. 하지만 어쩐지 내 안쪽은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고 자작대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2022. 12. 29


선주가 앓아누웠다. 나는 아침부터 병원을 향해 페달을 강하게 밟았다. 본인은 단순하게 감기에 걸린 것 같다 말하지만, 별도 직원 한 명 없이 일하는 우리의 손이 얼마나 쓸쓸한지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오늘만 견디면, 오늘만 견디면…… 대체 그딴 쓰레기 같은 말이 어딨어? 내일 같은 건 영원히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발발 떨리는 주먹에는 오늘밖에 잡히지가 않는다.

선주를 병원에서 쉬게 둔 뒤 점심시간에 가게를 열었다. 손님들은 설거지를 잔뜩 쌓아둔 채 땀흘리는 나와 시계를 번갈아 보다가는 음료를 취소하고 돌아갔다. 나는 저녁이 되기 전에 문을 닫고 한참을 그 설거지거리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도 오늘은 혼자다. 씻고 앉아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잔 꺼냈다. 티비를 켜려다가 리모컨을 내려놓고 그냥 소파에 기대 누웠다. 우리에게 정말 내일이란 게 있을까. 내일이란 건 영영 오기나 하는 걸까…… 찌그러진 눈을 뜨는데 티비 아래의 선반에 놓인 돌님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그 앞으로 다가가 섰다.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데, 그 와중에도 돌님은 어떤 기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돌님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언제나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그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나를 아끼고 생각하는 돌님을 나는 지독하게 모른체해 왔던 거다. 그걸 단호하게 외면하니 문제들이 나아질 리 없었다. 쓰러지는 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다. 쓰러지고 나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와도 외면해버리는 멍청함이야말로 우리의 운명을 밑바닥으로 처박아버리는 거다. 나는 밤이 깊도록 행주로 돌님을 이리저리 닦았다. 그 거친 면에서 광이 날 때까지 간절히 빌며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팔이 아무리 아프고 땀이 아무리 흘러도 멈추지 않았다.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해가 떴다. 선주에게서 몸이 눈에 띄게 괜찮아졌으니 내일부터 다시 출근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그제서야 씻고 출근할 준비를 했다.


2023. 1. 5


우리는 한 살을 더 먹었고, 어깨에서 조금 더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신년이 되던 날은 친구들을 만났다. 돌님과 친구들이 다함께 모여 무언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선주를 데리고 오는 편이 좋았겠다, 하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래도 가게에도 돌님을 하나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돌님을 두 명 이상 섬기면 노여움을 살 수 있다며, 본인들이 함께 제사를 지내 주겠다고 했다. 가게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데 89만원이면 아주 싼 값이었다. 물론 선주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가 쓰러질 정도로 아팠던 것과 내가 회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게 전부 돌님을 외면했던 때문이란 것에 대해 자꾸만 부정했다. 게다가 사람 얼굴만한 저 돌님이란 건 가게에 두기에는 미관상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답답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다. 나도 어리석었으니까. 중요한 건 배우는 거다.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고마운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돌님을 제공해야만 한다. 제 가엾은 운명을 돌님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어루만져주는 그 느낌을 모두가 나눠받았으면 한다. 결국 선주와 한껏 다투긴 했지만, 혼자 뛰어나와 제사를 지내고 돌님을 모셔와 카페 입구 옆에 두었다. 좁은 내부였지만 돌님이 없는 것보다야 훨씬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돌님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은 내가 출근한 직후, 그리고 퇴근하기 직전에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2023. 1. 28


그 아이는 들어올 때부터 불결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다운 귀염성이 없고 억지를 부리는 듯한 그 고집스런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곱 살 정도 된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밖에 눈이 펑펑 내리는데도 아이스초코를 주문하고는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뛰었다. 나는 재빨리 음료를 만들어 내면서 아이와 눈을 맞췄다. 웃으며 손을 잡고 이름을 물었는데,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보더니 손을 뿌리치고 다시 뛰었다. 이런 경우에는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내 아이가 이런 행동을 했다면—물론 나는 다행히도 아이랄 게 없지만—나는 곧바로 아이를 앉히고 따끔하게 예절에 대해 훈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아주머니들 중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들의 그 재미난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 알 수 없었지만 짜증이 났다. 매대로 돌아와 선주에게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선주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세 쌍이나 되는 부부 손님이 들어와 나는 정신없이 음료를 만들었다. 시끄럽게 서로의 샷이 어쩌고, 당신 자세가 어쩌고 말하는 게 스크린 골프를 함께 다녀온 것 같았다. 세 번째 바닐라라떼를 만들고 있는데 또다시 타다다닥 하는 소리와 아아 하는 비명 비슷한 게 들리더니, 어쩐지 내 삶에 깔리는 비극적 음악의 도입부처럼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만들던 음료를 밀어두고 고개를 내었더니, 아이가 무릎을 붙잡고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아이가 팍 하고 돌린 고개를 따라가니 돌님이 아직도 흔들흔들 하며 온 몸을 뒹굴고 있었고, 또 아이 얼굴 바로 옆에 팔 분의 일 정도 되는 돌님의 조각이 두 개 뒤집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돌님이 낸 건지 내가 낸 건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야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그제서야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며 이 쪽으로 걸어왔다.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밀쳤을 때, 아이는 돌님의 두 번째 조각처럼 힘없이 뒹굴었다. 나는 일어나려는 아이에게 또다시 걸어갔다. 어디 하나라도 부러트리면 돌님이 노여움을 거두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주가 헐레벌떡 뛰어와 아이를 일으키고 어머니께 허리를 굽히더니, 나를 붙잡고 가슴께를 팍팍 쳤다. 허리에 손을 얹고 구부리라고 힘을 주기도 했다. 손님들이 모두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의 내일은 여전히 박살난 채 뒹굴고 있었다. 나는 당장 돌님을 들고 가게를 뛰쳐나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급하게 마주한 친구들은 내 무리한 부탁에도 제사를 지내 주었다. 나는 연신 고맙다고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2023. 2. 5


그 날의 일은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하기도 싫다. 아무튼 경찰이 집 문을 두드렸다. 아주머니는 뭐 이런 싸이코가 가게를 하냐며 소리를 질렀고,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조곤조곤 얘기했다. 아이를 제지했어야 했다고. 그렇게 뛰는데도 가만히 두는 건 잘못된 게 아니냐고. 선주는 내 왼쪽에 앉아 손톱으로 내 손바닥을 세게 눌렀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는 삼백 만원이 넘는 돈을 드리고서야 가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돈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경찰은 유치장과 합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굴었다. 나는 그 경찰을 때리고 싶었다.

그 아주머니가 계모임장인지 파워블로거 비슷한 건지 뭔진 몰라도 힘이 있었던 것 같다. 가게로 오는 손님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회사원들은 분명 그 아주머니와 상관이 크게 없을 텐데도, 이상하게 많이들 발길을 끊었다. 매출은 급격히 내려앉은 이후엔 원만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그 감소를 원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몇 개 안 남은 우리의 다행 중 하나였다.


세 번째 돌님을 위해서는 저번보다 두 배로 큰 제사를 지내야 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기 위해 선반을 주문제작했다. 아무튼 새 돌님은 저번보다 더 튼튼하고 영롱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이제 매출은 조금씩 나아질 거다. 문제는 전부 해결했다. 나는 가게를 노 키즈 존으로 두자고 선주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선주는 눈을 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23. 2. 24


선주가 이상한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제발 그렇게 해 달라며 울었다.

우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2023. 3. 5


전부 내 잘못이다. 이 지저분한 삶에 내 탓 이외의 무언가가 존재할 리가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이런 새끼와 이 년이나 살아 준 선주가 대단한 거다.


요 즈음의 모든 것은 나에게서 떠나가려고만 한다. 가게는 아무래도 돌볼 여력이 없어 자꾸만 휴일이 된다. 휴일. 그만 쉬고 싶어. 일도 없고 일 바깥도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혼자서는 일할 수 없다. 돌은 여전히 거실에서 반질반질 빛나고 있다. 무언가가 뜨거운 게 안쪽에서 울컥대며 목을 때린다. 살아간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대체 어디서부터일까. 아무래도 아버지부터다. 이럴 때가 되어서 아버지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쓰레기 같은 나의 버릇이지만 어쩔 수 없다. 태어나버린 것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낳아진 걸 어떡하면 좋아. 불행 옆에서 태어나 불행 안쪽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쭈그러진 삶과 후천적 가난을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 걸까. 집으로 돌아가듯 나는 자꾸만 불행을 향해 걷는다. 결혼이란 건 이럴 때 함께 걸어도 괜찮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거였을 텐데. 이런 생각부터가 더러운 거다.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여기서 끝을 내 버리는 건 어떨까? 아무래도 이야기를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나의 죽음이 꼭 필요할지도 몰라. 그 쪽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게 옳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안합니다, 모두 미안합니다.


끝.



나는 홀린 듯 페이지를 넘겨대다 잠깐 동작을 멈췄습니다.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이 두려워진 까닭입니다. 이 뒤가 온통 비어 있다면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어요. 병운은 살아있습니다. 물론 끝이 아니에요. 그걸 알고 있는데도 나는 이 일기가 이대로 다음을 이어나가지 못할까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페이지를 넘긴 뒤 천천히 눈을 뜨고, 나는 안도의 숨을 뱉었습니다.



2023. 4. 8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지난번에 쓴 일기를 백 번은 반복해서 읽었다.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백한 번째로 읽던 중 나는 거실의 돌을 들고 차에 올랐다. 차에 모셔 놓았던 두 번째 돌과, 카페에 놓인 세 번째 돌까지 트렁크에 넣었다. 샛강으로 그대로 달려가 흐르는 물에 세 개 모두 던져버렸다. 숨이 조금은 선명히 쉬어지는 것도 같았다.


나는 지독하게 멍청할 뿐이다.


가게의 직원을 뽑았다. 동혁이란 이름의 건장한 청년이다. 일을 맡기고 나면 조금은 마음에서 무게추를 떼는 것도 같다. 가게는 다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애초에 더 나빠질 것도 없는 매출이었다. 그 어떤 영향이 와도 여기서 더 내려갈 수는 없다. 나는 그냥 음료와 빵을 열심히 만든다. 그리고 가끔 동사무소에 들러 서류를 제출한다.

선주는 집을 나갔다. 어딘가로 갔겠지. 좁은 집이라 매일같이 투덜댔는데, 이제는 너무 넓다. 내게 필요한 공간은 이 정도로 많지 않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창을 열고 중얼거리면 조금은 용서받는 기분이 든다. 그저 나는 아직 더러운 숨을 쉰다. 이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딱히 없다.


2023. 11. 17


이제 나에겐 법적으로도 아내가 없다.

갈색 봉투를 처음 열어봤을 때쯤 나는 어딘가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며 선주를 원망했다. 불행을 베고 누워야만 잠들 수 있는 날들. 한심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선주를 사랑했던 것 같다. 이혼 합의서에서 뿜어져 나오던 모든 슬픔은 그 이유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선주가 그걸 들이밀며 울었던 이유도, 나는 우리의 이 빠지고 뒤틀린 사랑 때문이라고 믿는다. 추악한 자기위로만 남은 새끼라고 모두가 욕해도 좋다. 나는 여전히 결혼이란 게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불행 곁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피를 뚝뚝 흘리면서. 자꾸 그런 말을 하니까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그저 끊임없이 투정을 부렸다. 나는 선주를 거의 살해할 뻔 했다. 한없이 한심하고 밉다.


그래도 숨을 쉰다. 나도 숨을 쉬고, 선주도 숨을 쉰다. 결혼이란 게 만약 희생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 중 결혼한 것은 선주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도 선주만이 말할 수 있는 거다. 염치 없지만, 선주도 한때는 나를 사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어쩔 도리가 없는 폐품이다.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분다. 골목을 타고 4층의 집 창문까지 피어오른다. 나는 아마 살아야만 할 것이다. 이딴 지저분한 꼴을 하고도 나는 죽기 싫다. 자신은 없다. 하지만 살아야만 한다. 죽어버리는 건 너무 인간적이고 쉬운 일이라 나에겐 과분하다.


자신은 없다.



나는 또다시 동작을 멈추고 노트를 자세히 들여봤습니다. 11월 17일의 일기 뒤로는 몇 페이지가 찢겨나가 너덜너덜한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노트의 상태와 그 내용이 복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시선을 옮겼고, 수분이 내 눈을 타고 빠져나가려는 걸 간신히 붙잡았습니다.


2024. 2. 23


연정을 만났다.


집에 오는 길에는 가로등을 발로 찼고 담배를 피웠고, 아무래도 귀갓길은 긴 편이 좋다는 말이나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 뭐 해?”

“흐읍……!”

고개 뒤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나는 무슨 약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근육을 움직이지 못한 채 굳었습니다. 고개를 올려 바라본 곳에는 얼굴이 발개진 병운이 흐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흔들며 방문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습니다. 심장은 이건 정말 위험하다는 듯 뜨거운 피를 쉼없이 쏟아내며 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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