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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화토크

우리도 파잔의 피해자일 수 있다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

by 세비지

파잔(Phajaan)은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의식이다.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하는 의식이다. 이때 코끼리는 사회에 굴복해야만 살아남는 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된다. 그렇게 냉혹한 현실에 순응하며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그들은 자유를 찾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우린 어렸을때 질문 정말 많았다.

’아빠! 난 어떻게 태어났어?’ ‘저건 뭐야?’

’엄마,이건 왜 이렇게 생겼어?’ ‘이건 왜 이래?’

아이들은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질문이 사라지게 된다 질문하는 것이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인생을 살면서 또 한 번쯤은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는 왜 살까?’ 하지만 우리는 어느순간 또 이 질문을 멈춘다. 현실적으로 도움도 되지 않고, 어디서 부터 이 답을 찾아야할지 모르겠으니 이 질문은 나를 고통스럽게만 만들기 때문이다.


파잔은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의식이다. 절반의 코끼리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지만, 강인한 코끼리는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코끼리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적으로 어렴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을거라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엄마를 찾으면 안된다는 것

몽둥이의 고통을 이길 수 없다는 것

발목을 묶은 밧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


코끼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다. 코끼리는 덩치가 커져 발목에 묶인 밧줄을 끊고 자유를 찾을 수 있음에도 ’풀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사로 잡혀 그 세계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질문을 멈춰라

이걸 바라보는 우리들은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몽둥이를 든 가난한자들에게 분노를 한다던가, 악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 이건 단순한 선과 악의 문제를 넘어선다. 어쩌면 파잔의식을 시행하는 자들도 영혼도 이미 산산이 부서진 피해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정과 사회도 그들에게 말했을 거다. ‘질문을 멈춰라.’ ‘그것은 먹고 사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는 척 했을 것이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 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을 투영해보면 비슷한 부분이 많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일 수도, 또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 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이다


그래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의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이미 우리의 영혼은 거대한 세계의 체제 아래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 질문이 나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질문이 아닌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는것이다. 그렇기에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하지만, 이 질문은 주홍글씨처럼 우리를 맴돈다.



저자는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힌트를 준다.

워낙 방대하고 심오한 주제들로 큰 맥락을 만들다보니, 삶과 나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조건에 대해 먼저 운을 띄운다.


먼저, 우리는 종종 세상을 일차원적인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나를 생각의 틀안에 가둘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질문을 하나 던진다.



세계를 A와 B로 나눈다면, 그 세계의 근본 구조는 무엇이 될까요?

먹을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뉜다.’라고 할 수도 있으며 생물학에 관심이 많다면 ‘세상은 생물과 무생물’ 또는 ‘남자와 여자로 나뉜다’라고 답할 수 있다.

또는 화두인 ‘타투를 한 사람’과 ‘타투를 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

이러한 대답들은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눈 사고다. 나는 여자이면서 동시에 생물에도 해당이 되기때문에 이 모든것들을 하나로 포괄시킬 수 있는 기준은 아닌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넓혀서 모든 기준들을 포괄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근본 구조를 말한다면, 자아와 세계다. 바로, 세계를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와 그 자아가 경험하는 ‘세계’ 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아마도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고, 태어나서 한번도 그 색안경을 벗은 적이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색안경이란 기독교, 불교, 과학, 자본주의, 공리주의, 공산주의 등등 형태이다. 모두 자신의 것은 색안경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자신의 색안경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사실 기존의 믿음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관이 진리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과 자신의 세계관이 하나의 편견이나 선입견일 수 있음을 열어놓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만약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조건으로 ‘방대한 지식’을 꼽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용기’다. 용기란 내가 쥐고 있던 세계관을 내려놓을 용기다 내가 믿는 진리가 거짓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말이다.

사실 말이 쉽지 정말 어렵다 내가 평생 믿어온 종교, 공부해온 학문, 정치적 입장을 부정하는 것이니까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기해야 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과거에 내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상실하는 거고, 동시에 아무런 대안도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나를 내던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로 용기가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상실과 미래의 불안으로 나아갈 용기, 진실 아래에서 색안경을 벗어낼 용기. 그것이 거대 사상과 만나고 한단계 더 성장을 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대부분 태어나서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다가 아무 문제없이 죽는다. 다만, 삶을 주어진것에 순응하며 ‘사는 것’ 그 자체만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사람이라면 결국 근본적인 의미를 찾기위해 철학, 사상, 인문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어쩌면 파잔의식을 치른채 영혼이 부서진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색안경을 고집하며 나의 의미에 대해 외면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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