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은 고통스러울때가 많다. 내면의 깊은곳에서 부유하던 불확실한 ‘어려움’이 능력 부족, 사회적 도움 부재, 자원 부족, 시간 제약, 심리적 장벽 등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며 실체화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너머의 ‘앎’을 추구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실천 하며, 극복할 수록 우리는 강인해지기 때문이다.
종종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우리는 쉽게 포기한다. '난 안돼', '사회적으로 부족한데 이걸 어떻게 해?'라며 스스로의 능력이나 환경을 의심하고, 그저 순응할 뿐이며, 현재에 안주하려 한다. 하지만 젊음은 *안티프래질 속성을 지닌다. 고통에 직면하고 극복할 수록 강해진다. 이는 마치 일부러 감당 가능한 약한 세균들을 주입하여 백혈구를 더 강하게 만드는 백신 접종과 비슷한 맥락이다. 무협지에선 만독불침을 얻기위해 독을 소량씩 일부로 먹는 경우도 봤을 것이다. 우리는 감당가능한 고통과 싸워 이길수록 강해진다.
이상을 잃을때 우리는 비로소 늙는다. 비록 우리의 육체가 젊을지라도, 시도보다는 포기를, 호기심보다는 좌절을 택하며 가능성과 의심을 멈추고 현실에 순응한다면, 우리는 늙었다는 말이 어울릴 수 있다. 청춘의 두 번째 뜻은 왕성한 정열과 힘찬 기세, 기백으로 나아가는 상태라고 한다. 지금은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일에도 열정을 쏟는다. 그 과정에서 수백만번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주저앉는다. 주변에선 '이런 데 시간을 왜 써? 돈을 왜 써?', '네가 이걸 어떻게 해?'라고 말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우직하게 일어나 다시 행할 뿐이다. 지금의 짧은 만족을 뒤로 미루며 나아가 결국 이상을 이룬다.
나는 그들의 젊음을 찬양한다. 이는 육체적 젊음과는 다르다. 누구나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게서 예상치 못한 생기와 활력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마치 아이처럼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배운다는 것이다. 정년퇴직을 앞둔 중년 남성이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3시간 정도 공부를한 뒤 출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컴퓨터를 배우고 유튜브에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젊음이 단순히 물리적인 신체와 나이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나는 젊음을 '현실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고, 스스로 알아가며 극복하는 힘, 그 과정 자체'라고 정의한다. 즉 나이불문 누구나 누릴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무거운 가치이자 특권인 것이다.
*안티프래질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저자의 책, 불확실성과 충격을 성장으로 이끄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