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의사소통에서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연구에 따르면, 비언어적 요소인 몸짓, 표정, 억양 등이 의사소통의 70~93%를 차지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언어 자체는 표현의 매개체로서 불확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어가 의사소통의 차이를 줄여준다고 착각한다. 그 이유는 허공을 떠도는 나의 생각과 감정에 사회에서 존재하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히 편의성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이 이름표는 공통일 수도, 나만의 것일 수도 있어서 여기서 의사소통의 차이가 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너 김영희 알지?'라고 했을 때 나는 3반에 있는 김영희를 말하고 있지만, 상대방은 10반에 있는 김영희로 알아들을 수 있다. 만약 두 명의 김영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화의 주체 둘 중 한 명은 '몇 반 김영희'라고 대상을 구체화하겠지만, 몰랐거나, 상대방도 당연히 내가 생각하는 김영희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넘겨짚었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가끔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신나게 말하고 있었는데, 대화할수록 묘하게 이질감이 들어 '너 이거 말하고 있는 거 맞지?'라고 했을 때 '아니, 나 다른 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라고 하며 서로 어이없어 웃었던 경험들 말이다.
최근에 재미있는 일화를 들었다. 친구가 군대에서 겪었던 일이었다. 실탄을 장착한 총으로 유격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조교가 훈련병 한 명이 사람을 향해 총구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총기 돌려!'라고 소리쳤더니, 그 훈련병은 총기를 사람이 없는 쪽으로 총구를 돌리는 게 아니라, 그저 팔을 허공에 원을 그리며 총구를 돌렸다고 한다.
언어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단어의 개념 자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단어에 우리의 생각과 정의를 담는다. 예를 들면 요즘 화두인 '행복'도 그렇다. 누군가는 행복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고, 편한 사람과 재밌는 것을 할 때 행복하다 한다. 또 다른 이는 행복을 성취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성과를 내고 물질적인 결과가 따라오며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행복하다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느끼는 감정 자체는 긍정적인 감정을 행복이라 부르지만 행복을 느끼는 방법, 정의가 다르니 미묘하게 대화가 안 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번은 그런 적이 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나와 친구 모두 '멋지게 살고 싶다'라고 답했다. 공통된 답안에 서로 통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방향이 달랐다. 나 같은 경우는 세월을 겪으면서도 순수함,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멋지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친구는 멋진 카페를 가진 돈 많은 오너가 멋지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같은 단어와 언어를 통해 소통하더라도, 그 단어로 표현하기까지의 경험과 해석, 감정과 생각을 거치며 단어에 주관성이 생기기 때문에 대화에 큰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문장 속 모든 단어가 상대방과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단어의 배열이 문맥으로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문장은 그 관계에서 살아 숨 쉬게 된다.
그렇다면 대화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주관과 상대 주관의 교집합을 넓히는 것이 대화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면 된다. 상대방이 나열하는 단어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질문하는 것이다.
단어마다의 상대방의 기준과 정의를 물어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는지 물어본다. 가끔 친구들에게 무슨 인터뷰하냐며 무섭다고 듣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밑바닥부터 이해하기 위해 많은 질문을 하는 편이다. 그러면 맞춰지지 않았던 생각의 차이가 좁혀지고 언어의 온도가 맞춰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때부터는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아도, '아'하면 '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