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낀 부끄러움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한다. 아니, 단순히 좋아하는 걸 넘어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즐긴다.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검증하며 흩어져있던 안개같은 것을 조금씩 다듬으며 구름으로 만드는 과정을 좋아한다.
이런 성향 때문일까. 나는 늘 안정된 길보다는 도전을 선택해왔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선택들이었다. 그렇게 그 선택들이 모여 내 삶은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극적인 곡선을 그려왔다. 바닥에서 치솟고, 다시 내리막을 타며,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파동 속에서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마치 거친 바다 위의 작은 배처럼.
이번에도 그랬다. 아침마다 하는 명상과 복무신조는 살짝 이해하기 어려웠고, 형식적인 것을 중요시한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나에겐 회사의 성장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방향성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잦았고, 그렇게 아무 대책 없이 회사를 나와버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직은 쉽지 않았다. 경제가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내 선택이 무모해서인지. 그렇게 서울의 살인적인 집값과 전기세, 가스비, 핸드폰비 같은 것들에 떠밀려 나는 콜센터 면접을 봤다.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직 전까지만 잠시 일을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회사생활하면서 낸 성과가 몇 개인데, 콜센터라니.'라며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스스로가 웃습다) '임시직'이니까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면접에 임했다.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얼굴 체크 정도면 될 거라 생각하며.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선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감정과 마주해야 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곳에는 절박하고 진심인 사람들만이 있었다. 오랜 경력을 쌓아온 사람, 야간근무를 병행하며 투잡을 하려는 사람, 그리고 다들 놀라울 만큼 직무에 진심이었다. 그들의 옷차림과 셋팅, 그리고 눈빛에서 나는 삶의 무게를 보았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면접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지원자가 당당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고객의 입장에서 소리를 듣는 지원자 000입니다. 저는 .."
그녀는 또랑또랑하게 본인의 경력과 얼마나 그 직무를 잘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파도와 싸워온 등대처럼.
그리고 준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흘러들어온 나는 어설프게 더듬거리며 겨우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저는... 음.. 이전에 해외영업을 하고.. 어..브랜딩도 했었고.. 그리고 서비스 기획을 하며 고객 인터뷰, 고객과의 어.. 소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너무 부끄러워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 말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마치 바람 하절없이 떨어져버리는 낙엽처럼. 웃기게도 합격 통보를 받긴 했지만, 그 결과와는 별개로 나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면접장에 있던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삶을 지키려는, 거센 파도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부표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에게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설 자격이 있을까.
나는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회사에서는 퇴근 후에도 직무와 관련된 지식을 쌓아왔다. 또, 퇴사 후에도 끊임없이 부업을 찾아다니기도, 퍼널을 구축하고 퍼스널 브랜딩을 하며, 모임과 콘텐츠를 기획하고, 밤을 새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산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아부으며 새벽 5시에 자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내가 소득을 만들고 있지 못한다는, 즉, 사회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그런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외면하고 싶었던 심연이 마치 비 오는 날 천천히 젖어가는 바지 밑단처럼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날의 면접은 나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치열했고, 그 안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삶의 의지가 있었다. 그것은 단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직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삶을 평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누구보다 고결해 보였고 누구보다 강인해 보였다. 아직도 직업적 프로의식으로 똘똘 뭉쳐 자신을 소개하던 지원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 선택지를 가진 채 투정을 부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나는 다시 생각했다. 과연 나는,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설 자격이 있었을까. 삶을 대하는 저 격렬한 의지 앞에서, 나는 그저 흘러가는 물살에 몸을 맡긴 채 표류하는 바다 위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면접장에서 마주한 건, 일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자들이 아니라 삶을 지키려는 생생한 존재들이었고, 진정한 프로들 이었다.
진정한 가치는 삶을 마주하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번 파도가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다음번에는 파도속에서도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부표가 되어보고 싶다. 그것이 내가 그들에게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