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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pr 08. 2021

'안녕'을 헤치고 / 이루시엔

공간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건 활기 그 자체였다. 기숙사와 강의실까지의 거리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기에 늦잠 자는 게 일쑤였다. 강의 시간이 바짝 올 때쯤 급하게 일어나서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트레이닝복, 머리를 질끈 묶은 차림으로 캠퍼스를 가로질러 가면 그 와중에도 알아보는 이들이 있어 바삐 손을 흔들고 갔더랬다. 촉박한 와중에도 수많은 ‘안녕’을 지나친 후에야 강의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데면데면한 사이에도 그렇게 눈짓 손짓으로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걸 짚곤 했다.


  졸업이라는 건 꽤 먼 이야기였다. 취업 준비에 한창일 때도 어딘가 직장을 구해야겠노라 했지만 그게 곧 대학 졸업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못다 채운 학점을 듣고 학교 내에서 스터디하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대학교 캠퍼스는 여전히 내 두 발이 딛고 있는 활기찬 무대였다. 다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정신없이 미래를 준비해나갔다. 수 없는 안부 인사 속에 ‘안녕’이라는 말은 빠짐이 없었다. 미래 걱정이 가득한, 어쩌면 살짝 우울한 소식을 전할 때도 두껍거나 얇은 친분을 뽐냈다.


  그러다가 이제 졸업을 하긴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같은 공간, 같은 거리에서 같은 가방을 메고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공기는 이미 달랐다. 안녕의 부재(不在) 였다. 아는 선배와 친구들이 하나둘씩 캠퍼스에서 사라져 갔다. 작은 캠퍼스를 걸어 다니면서도 혹여나 인사할 이가 있을까, 고개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어졌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앞만 보고 걸으면 될 일이었다. 대학 캠퍼스는 여전히 활기찼으나 그 활기는 이제 더는 내 몫이 아니었다. 무대 뒤편으로 내 처진 주인공이었다.


  언젠가 이런 기분을 또 느낀 적이 있었다. 이사한 동네를 다시 찾아갔을 때다. 항상 열고 들어가던 문을 이제는 다시 열 수 없고, 문가에서 들리는 까르르 소리는 우리 가족 것이 아닌 젊은 아이를 둔 부부의 소리였다. 나와 동생의 두발자전거와 네발자전거가 서 있던 현관은 보행기로 바뀌었다. 당연하기에 씁쓸한 일도 아니지만 뭔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같은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공간에 누가 어떻게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걸 새삼 느낄 때가 많다. 누가 그 공간을 지키고 있느냐가 여전히 내가 있어도 되는 공간인지, 아니면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공간인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대학교를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후 졸업식을 위해 다시 온 대학교는 나의 2011년 즈음과 다르지 않았다. 어머, 잘 지냈니. 안녕, 같이 사진 찍자. 안녕, 너도 올해 졸업하는구나. 인사치레일 뿐이라도 그 말이 정말 반가웠다.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공간에 있는지가 그 사람의 분위기나 태도를 바꾼다는 말일 테다. 그런데 톺아보면 정작 공간을 좌우하는 건 사람이더라. 대학교 캠퍼스의 활기도, 집을 채우는 훈훈함도 모두 구성원 덕이었다. 결국 모든 건 사람이다.


  누구든 한 공간에 오래 머무를 수는 있어도, 한 공간에만 머물진 않는다. 공간에 따라, 시간에 따라 나도, 다른 이도 같이 머물 수도, 먼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럴때 시간이 지나 그 공간을 떠올리게 되면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나 말투, 함께 나눴던 이야기로 공간을 기억할 듯싶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의 무대를 만들어 줬던 모든 이가 스쳐 지나가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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