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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pr 22. 2021

부제 : 직업병 리포트 / 이루시엔

습관

  직업병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이야기일 수 있다. 기자를 하다 보니 그 직업군에게서 흔히 보이는 습관이 몸에 배이게 된 건지, 아니면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지만 기자를 하기에 적합한 습관을 원래 갖고 있었는지 말이다. 전자든 후자든 ‘일과 삶의 분리’를 외치는 내가 정작 일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돼 살짝은 씁쓸해진다. 주변에서, 그리고 내가 겪고 있는 병 네 가지를 짚겠다.


①마감 병

  언제까지 마감하라는 시간을 주면 무조건 그 시간까지는 마감하는 습관이다. “거지같이 써도 마감은 꼭 지켜야만 한다”는 소리를 이골이 나게 들었다. 마감 시간을 안 지키면 5분마다 언제 기사가 올라오냐는 보챔을 부장이나 팀장, 심지어는 국장으로부터 들어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미리 마감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도 설렁설렁하다가 꼭 마감 시간 급하게 후다닥 기사를 완성하게 되는 병이기도 하다. 이 병은 비단 일에만 그치지 않는데, 기한이 정해진 모든 건 닥쳐서 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감은 어떻게든 지킨다’고 뿌듯해한다. 


②재촉 병

  남들 2시간은 기다릴 수 있는 것도, 1시간 기다리고 재촉하게 된다. 2시까지 자료를 보내주겠다고 하면 2시 5분부터 불티나게 전화를 걸게 된다. 누군가에게 뭘 물어본 다음에는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지 계속 재촉한다. 이야기하던 도중에도 누군가 말이 길어지게 되면 결론부터 말해달라고 한다. 결론 먼저 듣고 나머지 이야기를 듣는 게 마음이 편하다.


③연락 병

  업무 관련 카톡이 오면 최대한 답을 빨리해야 한다는 강박증이다. 길을 걷다가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일이 많아 요즘엔 좀 쉬엄쉬엄 답장하려고 하나, 뭔가 숙제를 끝내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빠르게 또 해치우곤 한다. 콜백은 무조건이다. 그래서 지금 분명히 일하고 있을 동종 직종 사람에게 연락을 보냈는데, 업무 관련 답이 늦게 오면 다시 2번 재촉 병으로 넘어간다. 휴가가 아닌 이상 안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일이 년 전까지 친구들 카톡의 1도 빠짐없이 남기지 않았으나, 카톡에 매몰되는 삶을 진정시키고자 요즘은 여유 될 때만 빠르게 답장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④친한 척 병

  낯을 많이 가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한 척 말 거는 걸 원래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친해질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차차 친해지게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글만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입사했는데 사람을 만나는 게 주 업무였다. 이때의 패닉이란. 입사 1년 차, 선배들과 취재원과의 미팅에 따라가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었다. 이제는 먼저 선배님, 대표님하며 친한 척 군다.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하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물론, 업무 미팅이 끝나면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 친한 척 온앤오프가 확실해졌다. 



  같이 기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면 공통으로 이런 모습이 있더라. 그래서 가끔 웃긴 일도 있는데, 빠른 연락 탓에 집에 보이스피싱이 와도 부모님이 걱정을 안 하시기도 하고 한참 수다를 떨고도 그 사람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동기들끼리 퇴근 후 만나기로 했으면 다들 퇴근 직전이 돼서야 분주하게 마감하느라 정신없고, 회사에서 의사 결정을 할 때는 너도나도 재촉하는 탓에 사흘이 걸릴 일도 하루 반나절이면 끝나고 만다. 일과 삶의 분리는 정녕 꿈의 단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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