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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May 06. 2021

봄날의 착란을 좋아하세요? / 이루시엔

비밀의 방

  스물아홉 봄에는 서른 봄이 궁금했다. 조금은 더 성숙해졌는지, 일은 잘하고 있는지, 여유는 좀 생겼는지 몹시 궁금했다. 스스로 위태로웠던 스물아홉이라고 생각했기에 서른에는 앞을 향해 잘 뛰어가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일 년 앞선 언니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잘하고 있을 거야 하며 막막했던 밤에 무작정 믿어보기도 했다.

  아이유는 스물다섯을 노래한 ‘팔레트’에서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이라고 했다. 같이 부른 지드래곤은 자신의 서른을 톺아보며 ‘아직도 한참 멀었는데’라는 가사를 적었다. 자기 자신을 조금 알아가고 있다는 스물다섯 앞에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하는 서른의 노랫말이 요즘 들어 퍽 위로가 된다.

  내 안의 비밀의 방을 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가 있다. 작년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고, 일은 그런대로 잘하고 있고, 여유도 좀 생긴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내가?’라는 생각이 맴돈다. 취향과 생각은 진해져 가는데 그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은 누구지,라는 착란의 상태에 다다른다. 내가 나를 연기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중학교 2학년 때나 할 법한 자아 찾기 숙제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 때때로 든다.

  비밀의 방 속, 길을 잃은 나는 크게 유형의 미로에 갇혔다. 첫 번째로는 ‘나도 나를 모르겠다’ 류.혼자 있고 싶다가도 그새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가도 막상 또 옆에 사람을 두려니 혼자 있는 게 낫겠다 싶어 혼자 있게 된다.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다가도 어느 순간 상대방의 반응에 압도돼 상대방이 원하는 말만 쏙쏙 내뱉다가 대화가 끝나면 묘한 자괴감에 사로잡힌다. 전화를 걸까말까 고민도 여러 번이다. 가만, 내가 원하는 건, 하고 싶은 건 도대체 뭐였더라.

  다른 하나는 “내가 정말 ‘그’ 내가 맞는가” 류.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한 집단 내에서 나는 ‘어떤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더라. 십 년 넘게 굳어진 이미지에 분명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그 이미지의 사람인가.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변하고 행동도 바뀌고 신념도 변화했을 텐데, 나는 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맞는가. 만약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나는 그것을 또 친구들에게 어떤 증명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마지막으로 ‘편안한 상태가 뭐였지’ 류. 본능적으로 제일 편안한 상태를 찾아서 떠돌게 되는데, 지금까지 내가 편안하게 느꼈던 것들이 진정 편안했던 것인지를 자꾸 되뇌게 된다. 그게 사람이든 장소든 물건이든 말이다. 예컨대, 만나면 항상 즐겁고 편안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특별한 이유 없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거나 언제나 가고 싶었던 장소가 이질감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 착란들이 엉키고 엉키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과부하가 오고 이불을 푹 눌러쓰고 잠자리에 들기 일쑤다. 

  ‘방구석 개똥철학’이라거나 ‘그건 누구나 다 겪는 자아탐구과정을 거창하게 말한다’는 비아냥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입 밖으로 내지 않고 혼자 비밀의 방 저 구석으로 처박아뒀다. 괜히 민망해 그 누구에게도 내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걸 들키지 않게 나를 완벽하게 연기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고민거리가 많은 사람으로도 아직도 자기 자신을 정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도 보이기 싫은 탓이다. 봄이 되면 모두 들뜨는데 괜히 진중한 척, 고민 많은 척한다고 유난이고 싶지도 않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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