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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May 21. 2021

다시 프린세스 메이커처럼 / 이루시엔

생각의 틀

  꼬꼬마 시절, 사촌오빠 어깨 너머로 본 컴퓨터 게임에 마음을 뺏겼다. 화면 속 갈색머리 여자아이는 예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했다. 오빠는 그 아이를 공부도 시키고 일도 시키고 선물도 줬다. 옆에 앉아서 여자애가 바삐 움직이는 걸 홀린 듯 지켜봤다. 내 또래 정도 돼보이는 여자아이는 금새 18살이 됐다. 그 아이는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다며 혹은 왕자님을 따라가겠다며 ‘아빠’인 오빠에게 작별을 고했더랬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안다는 바로 그 ‘프린세스 메이커’였다. 어느 공주놀이보다 더 실감나는 게임이었다. 며칠을 조르고 졸라 게임CD를 산 이후 프린세스메이커에 빠져살았다. 인터넷 카페에서 찾은 공략집 대로 ‘프린세스’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게임 속 내 딸은 아르바이트도 열심히하고 예절 공부도 열심히했다. 왕궁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왕궁 사람들과도 안면을 트고 무사수행을 나가서 용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딸과 놀러간 바캉스에서는 예쁜 딸의 모습이 갤러리에 하나둘씩 저장돼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키운 딸들은 공주도 되고 농장 주인도 됐으며 근위대장도 돼 내 품을 떠났다.


  그 게임이 다시 머릿속을 두드린 건 건 4년 전쯤 어느 한적한 주말이었다. 바쁜 나날에 지쳐 평일은 물론 주말에 일만 없다면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있는 것을 최고의 미덕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였다. 쉬는 게 내 삶의 1순위처럼 돼가고 있던 차에 문득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설레는 일도 없고 크게 재밌는 일도 없었다. 가끔 친구들과의 수다로 전화기를 한두시간 붙잡고는 있지만 그마저도 침대에서 이뤄지는 일이었다. 


  프린세스메이커 속에서는 내가 딸을 열심히 돌아다니게하고 배우게하고 일을 시키는 만큼 새로운 이벤트가 생겨난다. 무사수행을 나가 괴물들과 싸움도 하고 체력도 기르며 용과 친구도 되는 이벤트를 이 게임의 묘미지만, 내가 딸 스케쥴에 무사수행을 넣지 않는다면 전혀 접할 수 없는 이벤트들이다. 부지런히 게임 속 딸을 움직이게 하지않으면 다채로운 이벤트와 엔딩을 볼 수 없다. 게임 플레이 시간만 확 줄어들 뿐이다.


  침대에만 하루종일 붙어있는 내가 단조로운 스케쥴만 소화하는 프린세스메이커 속 딸 같았다. 밖에 나가지를 않으니 재밌는 일이나 나중에 돌아볼 추억이 생길리가 만무했다. ‘일-일-일-일-일-휴식-휴식’으로만 짜여진 스케줄을 계속 반복해왔던 셈이다. 큰 걱정거리도 큰 도전도 큰 불안함도 없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기만 했다. 이러다가 단조롭게 나의 삶이 끝날 것 같은 불안함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시야나 식견도 좁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있어선 계속 재미없는 채로 있겠다 싶었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소소하게나마 ‘그때 참 재미있었지’ 싶은 추억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계획을 짤 때 나름 재미있을 만할거리를 추가하게 됐다. 


  힘든 일도 굳이 맡아서도 해보고 친구들과의 약속도 빼지않고 적극적으로 나갔다. 몸 쓰는 걸 싫어했지만 운동도 배워보고 등산도 해보게 됐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재미를 알 것 같았다. 물론 약속을 잡아놓고도 침대에 붙어있고 싶은 충동도 가끔 일지만 꾸역꾸역 나가다 보니 이제는 어느덧 집에만 붙어있는 주말이 어색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저절로 재밌는 일이 생긴다거나 삶이 바뀌진 않는다. 재밌는 일을 만들고 추억거리를 만드려면 스스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은 유효하다. 내 생활이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때면 다시 프린세스 메이커를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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