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의 쥐들이여, 단결하라 / 박홀든

유행과 취향

by 글리

쥐가 문제다. 어제는 옆 동네에서 웬 사내가 피리를 불자 온 동네 쥐들이 쫓아갔다고 하더니 오늘은 양반집 도련님이 되고픈 쥐가 버려진 손톱을 주워 먹었단다. 뭐 그리 좋다고 기껏 피리 소리를 따르고, 뭘 그리 닮고 싶어 손톱씩이나 먹는단 말인가. 하여간에 쥐가 문제다.


취향과 유행이란 이름을 지닌 구름과 해가 내기라도 하는 것 같은 요즘이다. 과연 누가 저 친구를 진정(?) 그답게 탈바꿈시킬 것인가. 똑똑한 기계부터 교활한 광고까지 온 우주가 나서서 나도 아직 모르는 나를 만들려 안달이다. 유행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으로부터 이름과 유래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새로운 취향까지, 자신만의 개성을 찾으라는 강박이야말로 오늘날 유행과 취향이 내세우는 지상명령이다. 사실 취향과 유행의 본질은 모방에 있다. 사람은 본 만큼만 상상하고, 상상한 만큼만 그 자신이 된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결코 상상될 수 없고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으로서의 취향이 될 수 없다. 유행도 마찬가지다. 유행을 따르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 자신을 형성해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타인을 강하게 의식한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누군가와 닮아가길 원하는 한편, 개인적으로는 그들과 구별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 틈새에서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모방한다. 유행과 취향의 문제는 바로 이 틈새에서 함께 피어나기 때문에 온전히 자신만의 취향도, 오롯이 모두의 유행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전의 앞 뒷면과도 같은 이 유행과 취향이 이전 어떤 시기보다도 우리를 내기의 대상으로 삼는다, 끝없는 흉내의 굴레로 우리를 밀어 넣으면서.


유행과 취향이 지금처럼 서로를 조롱하게 된 것은 이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소비’가 된 이후이다. 오늘날의 유행과 취향은 결코 스타일이 될 수 없다. 본디 스타일이란 특정한 정신과 행동 규범을 포함한 특별한 삶의 양식과 그것을 따르는 자의 주관이 뒤섞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기호로서의 패션과 취향은 이러한 개인의 정체성으로부터 표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총체적인 모습이 아닌 겉모습만을 소비하는 이상, 이 몸부림은 언제까지고 ‘흉내’에 머물 뿐이다. 그리고 어떠한 삶의 내용이나 이유도 갖지 못한 흉내가 의미 그 자체가 되었을 때, 우리는 결코 신기루와 같은 유행과 취향을 쫓는 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유행과 취향이 서로를 힐난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메이저를 사랑해마지않는 옆 동네 영희도, 철저히 마이너의 길을 걷겠다는 앞 동네 철수도 피리 소리를 쫓아가고 있을 뿐이다. 길에 흩뿌려진 손톱을 잔뜩 주워 먹은 채로.


피리 부는 사나이의 선율이 어떠했는지, 도대체 도련님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야밤에 손톱을 깎았는지는 결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이 동화들은 뭐가 되었든 자기만의 개성을 소비하라는 현실을 은유하는 우화가 된다. 물론 모방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가꾸어 가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손톱을 집어 먹고, 사내를 따르는 일에서 벗어나는 길은 요원하다. 그러나 ‘피리 부는’ ‘도련님’이 우스워질 수는 있을 것이다. 왜 자꾸 남을 흉내 내라고 하는지, 왜 자꾸 무엇이 되기를 욕망하라고 하는지, 그러면서 왜 자꾸 돈은 뜯어내는지 따위를 묻기 시작한다면 말이다. 바로 그때 이 지긋지긋한 내기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제야 피리 부는 사내와 도련님이 아닌 함께 달리고 손톱을 나눠 먹는 다른 쥐들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도록,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도록 도와줄 모방의 대상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때 우리는 이 지난한 끌려감의 역사를 끝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쥐가 문제다. 아니, 쥐는 문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만국의 쥐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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