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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un 13. 2021

우리의 인생이, 훌륭하다 / 박브이

이야기가 있는 15 초

  신호탄이 울리자 출발선에 서있던 많은 마라토너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오늘도 계속 달려나간다'로 시작되는 나레이션은, 남들과 경쟁하며 되돌아갈 수 없는 같은 길을 혼자 뛰어가는 마라톤에 인생을 비유한다. 그러다 한명의 마라토너가 뜀박질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묻는다. '그런데, 진짜로 그럴까?' 이어 원래 뛰던 페이스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달리던 코스의 펜스를 뛰어넘어 전혀 다른 길로. 같이 뛰던 사람들도 이곳 저곳으로 방향을 바꾼다. 누군가는 산으로, 누군가는 바다로, 누군가는 하늘로. 원래 달리던 길을 묵묵히 달려 끝내 골에 다다르는 이도 있다. 각각의 방향을 각자의 속도로 나아가면서 터무니없이 넒은 세계를 경험해나간다. '모든 인생이, 훌륭하다(全ての人生が、素晴らしい)'는 카피와 함께 누가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했는가라는 대사로 영상은 마무리된다.


  헤드헌팅, 취업정보와 같은 채용 관련 사업을 하는 일본 기업, '리쿠르트'가 2014년 집행한 2분 짜리 영상 광고다. 흔히 쓰이는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말에 물음표를 덧붙였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더 빨리 달려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길을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가면 된다는 메시지를 드라마틱하게 전달한다. 구인구직과 관련된 회사로서, 새로운 기회와 다양한 만남을 강조해오던 다른 카피들과 맥을 같이 한다. '아직, 여기에는 없는 만남(まだ、ここにない出会い)'이라는 기업 슬로건이 그렇듯이 말이다.


  카피라이터를 꿈꾼 적이 있다. 언젠가는 선배가 될지도 모르는 카피라이터들의 책을 찾아 읽다가 이시은 카피라이터의 <짜릿하고 따뜻하게>에 닿았다. 책 안에 수록된 리쿠르트의 다른 인쇄 광고를 먼저 알게 되었다. 화자는 스스로를 더 잘 알아가게 되는 의외의 상황을 몇 가지 나열한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나보다 자신을 생각하는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새로운 만남을 통해 오늘과는 다른 내일의 내가 될 수 있을거라고 담담히 기대한다. 정답은 하나가 아니니 마음을 따르라는, 어쩌면 구태의연할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는 누군가에게 응원이 될 수 있는 맥락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리쿠르트의 다른 광고들을 찾아보다가,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고 외치는 마라토너를 만나게 되었다. 만약에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면 이런 카피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수 년이 지난 지금, 그때 생각했던 것과는 꽤나 멀리 떨어진 길을 걷고 있다. 되돌이켜보니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몰라 방향을 잡지 못하는 바람에 길을 헤매기도 하고, 잠시 발을 내딛는 것을 멈춘 적도 있었다. 어느정도의 속도가 스스로에게 맞는지 알지 못해 때로는 너무 빨리 가다가 지쳐버렸고, 때로는 너무 늑장을 부리다가 놓쳐버렸다. 그럼에도 차곡차곡 일상이라는 발자국을 남겨가며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든 그때와는 다른 여기에 있다. 오랜만에 본 이 광고의 울림이 깊어져 있던 것은 여기까지 오는 길에 했던 고민 덕분일까.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그렇게 지금 서 있는 길이,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게 될 길이 자신만의 길이라는 확신은 없다. 남들이 걷고 있는 길이 더 빛나보여 허무한 질투를 할 때도 있고, 그래도 덜 빛나보이는 다른 이들의 길보다는 낫다며 위험한 위로를 하기도 할 것이다. 또다시 길을 잃거나 주저앉아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는 여전히 넓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길은 우리가 서 있는 두 발 아래에 분명히 있다. 세상과, 사람과 맞닿는 몇몇 순간을 다음 한 걸음 한 걸음에 눌러 담으며 내딛다보면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아 있지 않을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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