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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un 28. 2021

그 웃음이 비추던 것 / 박브이

인생의 신스틸러

  유독 기억에 남는 기다림이 있다. 꽤 쌀쌀했던 늦가을이었다. K의 생일, 모처럼이니 직접 만나서 축하를 해 주고 싶어 처음으로 야자를 빠졌다. 미리 사 두었던 선물과 가장 근사해 보이는 것으로 고른 케익을 들고 혹시나 포장이 헝클어지지 않았나 몇 번을 확인하며 걸었다. 선물로 조각 조각 예쁜 모양의 천연비누를 골랐는데, 무슨 비누를 선물하냐며 놀리던 친구들의 말이 생각나 괜히 불안해졌다. 만나기로 했던 공원에 정해둔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어떤 표정으로 인사와 축하의 말을 건낼지, 그러면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대답을 해 줄지를 상상했다. 그저 웃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K는 남을 기분좋게 하는 웃음을 가진 친구였다. 살짝 올라가있는 입꼬리 탓에 늘 웃는 상이었던 데다가, 소리내어 웃을 때면 웃음 소리에 장난끼가 섞여 있어 주변이 괜히 밝아졌다. K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서울 안에 있는 여러 학교의 대표를 모아 3박 4일의 수련회 형식으로 진행된 워크숍에서 같은 반이 되었다. 회장 대신 부회장으로서 참여한 나로서는, 당연한 듯이 어느 학교의 회장이라고 소개하는 이들 사이에서 남몰래 의기소침 해 있었다. 부회장이라고 부러 고쳐 소개하던 내게 K는 무슨 상관이냐며 특유의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누구나 좋아할만한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여러 사람이 있을 때 먼저 말을 꺼내는 쪽은 못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 자주 둘러싸여 있던 K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반 별로 주어졌던 과제를 위해 의견을 주고 받은게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맨발로 들어가는 교육실에 모두가 들어가고나서 조용히 친구들의 신발을 정리하던 내게 고맙다고 슬쩍 말해주던 K였다. 워크숍 막바지에 두 명이 짝을 지어 한 명은 안대를 차고 다른 한 명은 말을 하지 않고 맞잡은 손으로만 신호를 주면서 산을 오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웬일인지 K는 나를 짝으로 지목했다. 몇 가지 신호를 정한 다음, 눈을 감은 K의 자그마한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중간에 신호가 꼬여 K의 머리에 나뭇가지가 부딪혔다. 어찌저찌 프로그램을 마치고나서 연신 미안해하는 나에게, K는 아프지도 않았다며 오히려 덕분에 재밌었다고 웃었다. 


  워크숍을 마친 후 각자의 학교로 돌아간 후로 K와는 한동안 보지 못했다. 같은 반으로 참여했던 친구들끼리 모여보려고 몇 번인가 시도했었지만, 고등학교 입시가 겹치면서 전부 무산 되었다. 가끔 메신저로 주고 받는 안부인사가 전부였다가 그마저도 뜸해졌다. K와 다시 만난 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했던 같은 취지의 워크숍에서였다. 멀리서 나를 알아본 K가 씨익 웃고 있었다. K는 지난 워크숍에서 부딪혔던 머리 부분을 매만지며 장난을 걸었다. 사실 내가 대표가 되었다는 소식을 어쩌다 들었다며, 혹시나 올까 싶었는데 역시나 왔다며 반가워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연락처를 주고 받았고, 이후 종종 이런 저런 일로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K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내게 이것저것을 챙겨주었다. 유명한 학원 강사의 교재 제작에 참여하고 있던 K의 추천으로 잠깐 노량진의 학원을 다녔다. 교재는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K로부터 수업 자료를 잔뜩 받고 등록을 했다. 수업을 들으러 들어가는 길에 가끔 K와 마주치곤 했는데, 어느 날은 공부 열심히 하라며 약간의 간식과 음료수를 주고 갔다. 등교를 하는데 교문 앞에서 익숙한 미소의 K가 손을 흔들고 있던 적도 있었다. 축제를 홍보하러 다니고 있던 K는 일부러 내가 있는 학교에 왔다며, 반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사탕과 과자가 잔뜩 듯 쇼핑백을 건냈다. 몇 주 후 우리학교 축제의 홍보기간이 다가왔고, 당연히 K가 있는 학교에 갔다. 친구들과 나눠먹을 간식과 K의 것을 따로 넣어 주었다. 뭐 이런걸 가지고 왔냐며 장난치듯 째려보던 K는 고맙다며 웃었다. 


  K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은 어느새 충분한 맥락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가 없었을 뿐더러, 기회를 만드는 방법에는 생각조차 닿지 못했다. 무엇보다 K의 마음이 어떨지가 더 무서웠고 겁이 났다. 스스로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은 대체로 따뜻한 기분이었지만, 가끔 그 누군가로부터 거절당하는 차가운 상상으로 이끌기도 했다. 서로의 학교 일이 마무리 될 때 즈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는데, K는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을 해 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쌓아둔 솔직해지기 위한 각오는 K가 꺼낸 다른 친구의 이야기로 무너져내려 버렸다. K를 바래다줄 때까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분간 연락을 하지 말아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K의 웃음이 보고싶어졌다. 마침 좋은 핑계를 댈만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맞게 된 K의 생일이었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오느라 조금 늦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벤치에 앉아서 K가 올 방향을 응시했다. 굳이 마음을 전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적당히 축하만 해 줄 요량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여전히 그간 켜켜이 쌓아 올린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연인이 되기 위한 제안으로서가 아니라, 담백하고 솔직한 표현으로서의 고백의 문장이 필요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겨우 말을 골라 다듬고 있던 중에 갑자기 머리가 하얘졌다. 시선의 끝에 웃음을 머금은 발걸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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