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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ul 18. 2021

그럼에도 미지의 한가운데에서 / 박브이

무서운 사람

  늘 그렇지만 모르는 것은 겁이 난다. 이 때의 모르는 것이란, 여전히 알지 못하는 무지와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를 포함한다. 무지는 괴롭고 부끄러우며, 미지는 막막하고 피로하다. 미지의 것은 결국 무지한 것이 되어버리기 일쑤인데, 이것이 앎을 허무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끔은 미지의 무언가를 미지인 채로 두기도 한다. 어른이란 많이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름을 깨닫다가 지쳐서 되는 존재라고 다른 글에 적은 적이 있다. 어른이 될 수록 겁쟁이가 되고 마는 것은, 무수히 많은 모름을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는 것 역시 무섭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모름은 두려움을 낳는다. 여러 의미에서 많이, 깊이, 넓게 알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면 조심스러워진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알고 있지만 스스로는 모르는 부분이 한없이 무섭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모름은 유독 부끄럽고 비참하다.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해 새로운 앎으로 이어질 지도 모르는 배움의 순간을 놓치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그렇지만,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를 때가 더 그렇다. 알 것이라 짐작하고 이야기했는데 모르고 있다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아득해진다. 그렇다고 애초에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했는데 알고 있다면 낯뜨거운 민망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겸허함이란 상대의 모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앎을 낮추는 것임을 깨닫는다. 상대방에 대한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많은 사람 중에서도 마주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특히 무서운 사람은, 스스로의 모름을 모르는 사람이다. 모름을 모르기에 알려하지 않는다. 모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결코 무게를 두지 않는다. 상대의 앎과 모름 역시 알 바 없다. 그저 자신이 지금 당장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이며 오로지 그것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어쩌다 듣게 되는 모르는 이야기는 새로 알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틀린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같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며 감싸다가, 그마저도 얄팍한 계기로 선이 그어진다.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는 사람이다.


  굳이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 보았지만, 모든 타인은 사실 무섭다.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서로 미지인 동시에 무지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혼자일 수는 없다. 각자가 소중히 간직하며 이어가는 관계의 의미는 서로 알고 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는 채로 끝나더라도 물음표 투성이의 허무에 함께 맞서는 데 있다.


  나는 아직, 아마도 늘 당신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가끔은 무섭지만, 그렇기에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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