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Oct 01. 2021

'덕'업예찬 / 박브이

요즘 무슨 생각 하세요?

  중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 인천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갖고 싶은 물건을 중고로 알아보다가 난생 처음 직거래를 하게 되었고, 판매자가 제시한 장소가 인천시청역이었다. 신촌이나 강남도 멀었던 당시로서는 시를 혼자 벗어나는 것은 모험이나 다름 없었다. 어지럽게 얽혀있는 노선도를 보며 맞게 가고 있는지, 몇 달 동안 모은 돈이 제대로 있는지를 몇 번이고 확인했더랬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30분 일찍 인천시청역에 도착했고, 공중전화로 판매자에게 천천히 오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의 인상착의를 알렸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판매자는 20분 뒤에 도착했다. 서로의 물건과 돈을 주고받고 확인한 뒤, 판매자는 생각보다 어려서 놀랐다는 말과 함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내가 건넨 4봉투에서 돈을 꺼내 음료수를 사 주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 전철을 기다리면서, 금방 받은 종이 봉투에서 그토록 갖고 싶었던 물건을 꺼내 보았다. 케이스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오타쿠'라는 말은 이제 무언가의 '덕'이라는 말로 분야에 관계 없이 폭 넓게 쓰이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심취해 있는 이들만을 일컬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별칭에는 묘한 시선이 섞여 있었다. 애들이나 보는 유치하고 영양가 없는 컨텐츠일 것이라는 촌스러운 편견도 그 중 하나였다. 거기에  2차원의 세계에 몰입한 나머지 현실을 외면해버린 나머지 일본에서는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까지 대두되었던 일부 오타쿠들의 어두운 면이 강조되어 버려, '덕밍아웃'이 더욱 힘든 시절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놀림을 받기도 했고, 만화책은 어디에서든 몰래 봐야 하는 압수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차곡차곡 틈틈이 '덕질'을 해 왔다.


  지금은 간혹 만나는 진짜배기들에 비해선 한참 못 미치지만, 가끔 농담삼아 '덕'을 쌓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약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자칭하는 20년차 덕후가 되었다. 그저 남들이 잘 모르는 몇몇 세계를 알기 위해 그들보다 조금 더 시간을 들였을 뿐이지만, 그 세계를 소개할 기회만 있으면 신이 나서 말이 많아지고 만다. 그리고 여러 작품에서 마주한 수많은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아 보는 것 또한 너무도 즐겁다.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타인으로서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에반게리온>시리즈와 <건담>시리즈에 공통적으로 녹아있는 물음은 지금까지도 고민하고 있는 화두이다.


  '덕질'의 본질 중의 하나는 ‘파고듦’인데, 그 핵심은 복습과 기다림이다. 이미 몇 번은 돌려 본 작품을 다시 보고 또 본다. 여러 번의 정주행을 통해 숨어있던 디테일을 새롭게 발견하고 열광한다. 그리고 그 희열을 다시 가져다 줄 작품이나 시리즈를 늘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린 콘텐츠가 나오면 잔뜩 기대를 품고 본다. 그리고 또 다시 본다. 이 반복되는 순환에서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탄생한다. 덕질로 세상의 모든 경험을 할 수는 없지만, 덕질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고 믿는다. 비단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대상으로 하는 덕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하자면, 파고들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루를 더 살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기에, 수많은 복습과 설레는 기다림의 반복은 우리의 일상과 어딘가 닮아있지 않은가. 덕질은 늘 우리가 삶에 몰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올해 초 일본에서 개봉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シン・エヴァンゲリオン劇場版:||, 2021)>을 끝으로 '에반게리온' 시리즈가 25년에 걸쳐 완결을 맞았다. 20년 전 인천시청역으로 모험을 떠났던 추억의 결말이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전 세계 공개가 결정된 다음 당연한 듯이 전체 시리즈를 한 번 다시 훑었다. 그리고 공개되자마자 한 번, 그 후로 한 달 여 동안 세 번 정도 더 보았다. 한 번 정도 더 보고 당분간은 넣어 두겠지만, 아마 몇 번은 또 다시 꺼내 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용과 결말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 시리즈의 다른 작품에 비해 사람 냄새가 많이 나서 좋았다. 원작자이자 총감독이었던 ‘안노 히데아키’가 자신이 만드는 <에반게리온>은 더이상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은 것은 아쉽지만, 그저 가만히 기다리면 그뿐이다. 덕심을 자극할 작품은 언제든, 언젠가는 나타날테니. 나는 여전히 덕의 길 위에 서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호흡이 들리는 거리 / 박브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