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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Sep 02. 2021

호흡이 들리는 거리 / 박브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리

  언제나 그랬듯이 규영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있었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핸드폰을 보니, 연수로부터 5분 정도 늦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규영은 '그 쪽으로 가 있을까?'라고 보내려다가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전부 지웠다. 그러고는 그냥 괜찮으니 천천히 오라는 내용의 답장을 전송했다. 둘 사이에는 아직은 그런 담담한 간격이 있었다. 그 거리감에 대해 생각하던 규영의 시야 밖에서 연수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연수의 발자국에는 피로가 짙게 묻어 있었다. 연수는 전날에 밤을 새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고보니 그 전날에도 제대로 잠을 못잤을 것이다. 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수 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규영과 연수는 서로 다른 대학에서 각각의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규영은 일단 이것저것 해 보자는 마음으로 관심있 던 분야의 대외활동에 지원했고, 면접에 가서 면접관으로 앉아 있는 연수와 처음 만났다. 규영은 티나지 않게 긴장하는 바람에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중의 이야기로는 왜 이 활동을 하고 있는지 올곧게 물어보는 규영이 꽤 인상적이었다고 연수는 말했다. 그렇게 규영은 연수와 함께 활동을 하게 되었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보는 사이가 되었다.


  연수는 바쁜 사람이었다. 학교 공부는 물론 과에서도 맡은 일이 있었고, 규영과 함께 하게 된 대외활동까지 하고 있어서, 언젠가 옆에서 슬쩍 보게 된 연수의 다이어리는 여러 일정으로 빼곡했다. 규영이 보기에 연수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하게 있어 보였고, 연수는 그것을 해내기 위해 꽉 찬 일상을 켜켜이 쌓아 나가고 있었다. 연수는 어찌됐든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규영은 왠지 모르게 그런 연수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영과 연수가 어쩌다 단 둘이 걷게 된 어느날 밤, 앞서가는 연수가 뒤따라가던 규영을 뒤돌아보며 웃음을 지었다. 규영은 마침 가로등 빛이 그려준 연수의 그림자를 조용히 밟고 멈춰섰다. 그대로 그 그림자에 스며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규영은 나름의 방식으로 연수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시답잖은 일로 괜히 연락하고, 없던 일을 만들어서라도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만들었다. 덕분에 틈틈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일주일에 서너 번은 보는 사이가 되었지만, 끝내 마음을 표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수의 일상에 자신이 들어갈 틈이 있을까, 규영은 늘 생각했다. 하나 둘 연수가 있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규영의 시선과, 걸음과, 말과, 생각이 연수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규영은 연수에게 있어 결코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규영으로 하여금 연수에게 애매한 거리를 두게 했다.

 

 연수를 기다리다 만난 오늘도, 간단히 식사를 하고 적당한 곳에서 서로 해야 할 일을 하다보니 어느덧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바람도 쐴 겸 조금 걷자는 연수의 제안에 규영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늘 버스를 갈아 타며 헤어지던 곳에 다다랐다. 연수가 타야 하는 버스가 먼저 정류장에 들어왔고, 규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던 이야기를 마저 듣겠다는 핑계로 연수를 따라 버스에 탔다. 연수는 의아한 표정에 웃음을 섞어 짓고는, 그러라고 대답해 주었다. 버스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버스를 타기 전에 했던 이야기를 계속 나눴고, 그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나서도 규영은 내리지 않았다. 버스는 계속 달렸다.


  그러다 규영은 어깨 위로 연수의 무게가 스르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연수는 규영의 어깨에 기대어 밀려있던 잠을 졸음으로 갚아내고 있었다. 규영은 당황해서라기보다는, 연수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버스 안은 나름 복작거렸지만, 규영의 청각은 연수의 호흡으로 가득 찼다. 연수의 여린 들숨과 날숨 사이에는 미묘한 질문과도 같은 찰나가 있었다. 규영은 조용히, 그러나 수없이 흔들리는 맥박의 언어로 그 틈을 채워냈다. 


  연수의 이야기로만 듣던 연수의 동네에 다 와서야, 규영은 조심스럽게 연수를 깨웠다. 슬슬 내려야하지 않냐고 묻는 규영의 물음에, 연수는 아직 제대로 떠지지 않은 눈으로 규영을 바라보며 먼저 내려지 그랬냐며 규영의 늦은 귀가를 걱정했다. 연수와 규영은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규영이 타야할 막차는 꽤나 멀리서 오고 있었다. 연수는 멀리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며 바로 앞에 있던 편의점에서 초코우유 두 개를 사서 하나를 규영에게 건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달콤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마침내 온 버스의 전조등이 규영과 연수를 비췄고, 두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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