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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14. 2021

받은 편지함 / 박브이

내 애장품을 소개합니다


  미니멀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편은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철마다 과감하게 버린다. 전공서적도 앞으로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다 갖다 버렸다. 시간을 들여 만든 프라모델도 수집보다는 조립이 목적이라 일정 시간이 지나면 버리거나 남에게 준다. 가끔 방이 정리가 되지 않는 경우는 자주 있어도, 물건이 쌓여 있는 경우는 요 몇 년 동안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숱한 버림 속에서 늘 제외되는 상자가 있다.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해 빠진 신발 상자다. 3~4년에 한 번 씩 신발을 사게 되면 새로운 상자에 내용물을 옮겨 닮는다. 겉에는 ‘받은 편지함’이라고 쓰여 있다.


  일생동안 받은 모든 편지를 모아둘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고등학교 이전의 것은 거듭된 이사 과정에서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그 이후에 받은 편지는 기억하는 한 모두 이 상자 안에 담아 두었다. 지금은 지나가버린 연인이 건네준 편지. 군에 있을 때 밖에 있는 이들이 보내준 위문 편지와, 반대로 군대에 있는 이가 보낸 편지. 뿐만 아니라 생일 선물과 함께 곁들여 준 카드나 엽서, 간단한 메모처럼 적어준 쪽지까지. 남들이 ‘나’를 독자로 상정하고 손글씨를 눌러담은 모든 것을 수집해왔다. 요즘에는 주소가 적혀있는 편지봉투도 그냥 버리기가 뭣해서 끝부분만 잘 잘라서 같이 담고 있다. 그러고보니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스스로가 일한 가치의 무게를 느껴보자’는 취지로 월급을 현금으로 받았었는데, 내가 해온 일의 무게가 담겨있었던 봉투들도 차곡차곡 모아져 있다. 이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말하자면 지상 유일의 텍스트다.


  기억에 남는 내용물을 하나 더 소개해 보자면, 받은편지함 옆에 크기가 남달라서 다른 상자에 따로 담아 보관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일본에서 보낸 1년 동안의 워킹홀리데이를 마무리할 즈음, 일을 하고 있던 라멘 전문점에서 송별회를 해 주었다. 같은 지점에서 일하던 동료들 이외에도, 가끔 지원을 나가서 알게 된 이들도 와 주어서 왁자지껄 인사를 나눴다. 유독 친하게 지냈던 동료 하나가 못 와서 아쉬워 했었는데, 자리를 파할 때 쯤이 되어서 부랴부랴 그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신발상자가 담긴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다른 이들의 박수와 함께 나에게 건네졌다. 상자 안에는 새하얀 운동화에 나를 아는 모든 직원들의 짤막한 작별인사가 빼곡히 적혀있었고, 그는 마지막까지 메시지를 받고 오느라 늦은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메시지를 다시 하나씩 차근 차근 읽으며 울고 웃었다. 그 후로 한 번도 신은 적은 없지만, 가장 아끼는 신발이 되었다. 


  새로운 상자에 옮겨 닮는 ‘상자갈이’를 할 때마다 한 번 씩 내용물을 훑어 보곤 한다. 내게 무언가를 보내줬던 이들 중에는 지금도 교류가 있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여러가지 이유로 소식이 뜸해 졌거나 전혀 소식이 오가지 않게 된 사람들도 있다.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사진을 찍어 수다거리로 삼아 한참을 떠든다. 반면 지금은 닿지 않는 이들은, 문득 안부가 궁금해져서 오랜만에 읽은 편지를 핑계로 연락을 해 보기도 한다. 다양한 글씨만큼이나 다양한 호칭으로 새겨져 있는 당시의 나를 혼자 회상에 빠지는 경우도 자주 있다. 따뜻하거나, 혹은 살짝 시린 웃음을 짓느라 상자갈이에는 언제나 시간이 더 걸린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보낸 편지함’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글씨로 누구를 위해 어떤 문장을 적었는지 기억하고 싶거나 다시 읽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도 그 즐거움은 그것을 받은 이들의 몫임을 잘 알고 있다. 대신 받은 편지함의 다른 한 쪽에는 비슷한 크기의 상자가 하나 있다. 안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엽서나 카드, 편지지와 편지 봉투가 잔뜩 들었다. 새로 편지지 세트나 카드를 사서 쓸 때도 많지만, 무언가를 적어서 보내야 할 일이 있으면 이 상자를 먼저 확인한다. 점점 더 상자를 열어볼 일이 적어지는 것 같아서, 요즘에는 일부러라도 그럴 기회를 만드려고 하고 있다. 상자의 겉에는 ‘보낼 편지함’이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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