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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Sep 03. 2020

얕아도 넓게 / 박브이

내 인생을 다섯 글자로 표현한다면?

  먹고 마시고 요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팔 수 있을 만큼 떳떳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레 어느 곳에 어떤 맛있는 것들이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여행을 갈 때에도, 어디에 가는지 보다 무엇을 먹는지가 더 중요하다. 자연스레 무엇으로 어떻게 맛있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처음 접하는 식재료를 요리하게 될 때면 설레기까지 한다. 스스로 만든 음식을 맛 보여줄 기회가 많지는 않지만, 인사치레로라도 맛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따뜻해진다.


  일본어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통번역 일을 기꺼이 맡을 만큼은 아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대부분의 유년생활을 일본에서 보냈다.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긴 했지만, 일상에는 일본어가 녹아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유치한 놀림을 받는 동안 전부 잊어버린 줄 알았다. 우연히 본 일본 애니메이션을 자막없이 볼 수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 만화도 그랬다. 딱 필요한 정도의 공부만으로 의사소통이 문제 없을 정도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또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있기에 더 많이 이야기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노래를 들려주고, 부르고,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어디가서 음악 좀 한다, 노래 잘한다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용돈을 모아 처음 샀던 음반은 ‘벌써 일년’이 수록되어 있던 ‘브라운아이즈’의 1집 카세트테이프였다. 소풍을 가거나 할 때면 좋아하는 노래만 따로 녹음해 만든 믹스테이프를 기사 아저씨게 내밀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몇 번씩 필사해서 외우고 노래방에서 연습했었다. 대학에 와서 가입한 동아리에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방학 중에도 매일같이 연습하며 무대에서 공연도 하고 밤새 녹음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일 좋아하는 취미인 줄 알았는데 이래저래 바빠지다보니 제일 찾게되는 취미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가끔 부르고 겨우 듣는다.


  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말보다는 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가 늘 궁금하다. 무엇을 해야 할 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강박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그러고보면 할 줄 아는 것은 꽤 많은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잘 한다, 잘 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다. 어쩌면 어떤 걸 해야 할 지 정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이 이렇듯 하나같이 ‘어중간’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어중간한 상황이 야기하는 조급함이, 무엇이든 할 줄 안다는 말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중간함 덕분에 갖출 수 있었던 스스로의 모습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중간함에서 오는 열등감이 그것에 더 열중하기 위해 필요한 연료가 되어준 적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어설프게 아는 것과 그것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늘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전혀 상관 없는 소재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꽤 괜찮은 장점이다. 대화의 시선과 지점을 여기저기에 둘 수 있다는 점에서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또한 그렇다.


  시간이라는 정성이 깊이를 만들어주는 것임을 안다. 지금 갖추지 못한 깊이가 언젠가 도달하게 될 깊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한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에서 비롯된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일테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에 조금씩 조용히 시간을 붓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렇게 하나 하나의 깊이를 갖추다 보면, 스스로가 가진 폭 또한 하나의 깊이가 되는 순간이 오리라.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얕아도 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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