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Mar 25. 2022

그대로도 완벽했던 순간 / 우드수탁

처음

  처음이라는 단어가 낯설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처음 경험하고 지나가거나 타의로 스타트를 끊어버린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처음을 떠올리자면 추억 속에 고이 간직해 평생 잊기 어려운 기억을 되짚게 된다. 꽤 예전 기억을 뒤지게 되다보니 영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과거 얘기를 하면 ‘라떼는’으로 이어지기 쉽고 왠지 현재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조심스럽달까. 그래서 문득 과거의 일이 떠올라도 입 꾹 다물고 혼자 고개를 저어버린다. 예전 일 떠올려서 뭐하냐며 애써 쿨한 사람처럼 비치고 싶은 마음을 품고서 말이다.


  그럼에도 주제라는 핑계로 처음을 떠올리자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약간의 분함도 조금은 깃들어 있는 스물 살 봄에 한 첫 키스다. 지금은 첫 키스가 대단히 중요치도 않고 뭐 꼭 의미를 담아야 하는 과정이냐 싶지만 당시에는 매우 특별했다. 그 땐 ‘혼전순결’이 평범한 단어로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친구가 연애를 시작하면 ‘손 잡았어?’를 자연스럽게 물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그런 질문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이다. 처음을 떠나서도 그 땐 사소한 스킨십도 큰 일처럼 느껴졌고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고등학생 때 ‘지붕뚫고 하이킥’에 출연한 윤시윤의 벚꽃 고백 장면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던 터라 첫 키스는 저 곳에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한다면 퍽 감동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대체 어떤 흐름으로 키스를 하는 순간이 이루어지는지도 몰라서 드라마라 가능했던 연출이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드라마의 폐해가 이렇게 무섭다) 어찌어찌 대학교에 입학해 제대로 된 첫 애인이 생겼고 조금씩 ‘첫 키스’의 순간이 다가옴을 느꼈던 것 같다. 벚꽃은 의지와 상관없이 피었는데 언제 질지는 알 수 없었고 첫 키스를 위해 혼자만의 각본/연출/출연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키스가 의도하고 만들어지기 어려울 뿐더러 처음인데 오죽했겠나.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연출이냔 말인가.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벚꽃은 그저 아름답게 버티고 있었고 그렇게 야속해보일 수가 없었다. 몇 개라도 떨어지면 스스로 합리화할 의욕이 넘쳤는데 도무지 떨어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함께 걷던 길이 벚꽃 동굴, 일명 CC의 성지라고 불리는 만큼 로맨틱해서 그 순간이 다가옴은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순간이냐 완벽한 장면이냐 혼자 별 고민을 다하다 결국 실토했다. ”벚꽃이 떨어지는 곳에서 하는 게 내 로망이야”


  그 때 벚꽃나무가 흔들렸다. 신이 도운 것인가 하면 당시 남자친구가 벚꽃나무를 온 몸으로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고개를 드니 선명한 밤 하늘 아래 벚꽃들이 흩날려 떨어졌다. 바람 하나 불지 않지만 흩날리는 벚꽃 아래에서 처음이 생겼다. 당시에는 결국 완벽하지 못했다며 혼자 조금 분했지만 돌이켜보면 부족했기에 더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풋풋한 감정, 설렘이 뒤섞여 전혀 쿨하지 않았기에 더 소중한 기억으로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애써 나무를 흔들던 그 때의 마음이 소중하고, 또 그것만으로 완벽하게 행복했던 당시의 감정 그대로 말이다.



  최근에 그 분이 결혼을 한 사실을 건너 들었다. 모든 헤어짐이 그렇듯 그 분과의 마지막이 처음만큼 아름답지 않았고 그 이후에 수많은 다른 처음이 있었기에 남은 감정은 없었다. 무심하게 ‘잘 됐네’라고 대답하면서도 마음 속으론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랐다. 헤어진 사이에 딱히 축복하지 않는 성격인데도 왠지 그 분만큼은 진심으로 바랬다. 잊을 수 없는 처음을 만들어 준 감사함과 함께 말이다. 그 처음으로 가끔은 벚꽃을 바라보며 혼자로도 따뜻할 수 있었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한 여름 밤의 꿈 / 우드수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