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Sep 09. 2020

몰(沒)공감 / 이루시엔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

  본가에 내려갔을 때는 암묵적인 통금이 있다. 자정. 서울에서 모임이 있는 날이면 밤 11시부터는 슬슬 어떻게 일어나야 하나 머리를 굴린다. 지금 출발하면 지하철은 탈 수 있겠고…이만 일어난다고 하고 일어나자. “오늘 일찍 가야 해서 먼저 가볼게”라는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또’냐고 아우성친다. 내가 없는 걸 아쉬워 하는 소리니 여기까지는 진심으로 고맙다. 가겠다는 소리를 기다린듯한 반응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아직 통금 안 없앤 거야? 나이가 몇 갠데. 부모님 왜 이렇게 엄격해.”


  “12시까지 들어갈 거면 11시 30분에 택시 타도 되잖아. 나랑 같이 타.”


  그럼 또 ‘그래’ 하면서 앉지만 택시를 같이 타면 된다는 친구는 절대 11시 30분이 돼도 출발하는 일이 없다. 11시 40분이 돼서야 ‘나 진짜 가봐야 해’ 말을 던져놓고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면 왜 그렇게 유난이냐는 식의 장난 섞인 말이 귀에 꽂힌다. 결국 11시 50분에 택시를 잡아 3만원이 넘는 택시비를 내고 집에 들어가면 괜히 또 한소리 듣는다.


  그럴 때면 속에서 조금씩 화가 난다. 택시비가 많이 나와서도 부모님 핀잔을 들어서도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데 왜 고려를 안 해주지’ 싶은 거다. 나라고 그 자리에 더 있고 싶지 않았겠나. 20살이 되자마자 통금을 없애려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이게 통금 최대치인걸. 집안 분위기는 집안마다 다른데 말이다. 11시만 넘으면 초조해지는 상황을 조금만 이해하고 공감해주면 어떻나 싶었다.


  적어도 특정 상황에 그 사람이 돼 생각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논리적으로 시비를 가려야 하는 문제에서도 이해와 공감만을 바라는 건 지양해야 하지만 자기 상황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것도 썩 좋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런데 이정도 공감 부족은 애교 수준이다. 일부러 공감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높이는 부류의 사람을 만날 때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너와 달라’라고 일부러 선을 긋는 언행을 마주하거나 옆에서 지켜볼 때면 “그러다가 네가 선을 그은 저 상황이 되면 어쩌려고 그래”라는 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느라 힘들다. 이해와 공감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도 조언을 핑계로 가르치려고 하는 건 앞으로의 대화를 막기까지 한다.


   헤어져서 힘들다는 친구한테는 말없이 토닥여주면 되는 거지, ‘난 헤어지고 울고불고하는 게 이해가 안 되더라’ 하는 말은 음소 낭비다.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은데 계속 낙방해서 고민이라는 친구에게 ‘너는 왜 그렇게 대기업에 가려고 집착해?’라고 말한 사람이 그로부터 머지않은 미래에 대기업 원서만 수차례 내는 걸 목격했다. 중앙일보 최종면접에 떨어져 우울해하는 스터디원에게 자신은 절대 ‘보수 끝판왕’인 조중동과 경제지는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은 몇 년 후 ‘친기업’을 주창하는 어엿한 경제지 기자가 돼 있었다.


  상황은 계속 바뀌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이자 묘미다. 그 말인즉슨, 내가 언제 어떻게 저 사람 상황에 처해있을 지도 모른다는 거다. 어제의 쟤가 오늘의 내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래서 선은 신중하게 그어야 하고 시기적절한 이해는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상대방 상황에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쯤은 가져도 된다는 거다. 본인도 언젠가는 이해를 받기 위해, 또 공감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붙잡고 말할 것 아닌가. 내로남불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갑자기 늙어 버렸다. 준비만 하다가. / 이루시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