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Sep 21. 2020

하루 남은 사색 / 박브이

죽기 전 나에게 단 하루가 남아 있다면?

  긴 여행을 앞두고 있다. 여행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그런 점에서 돌아오지 못할 이 여정을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관점에 따라서는 훨씬 이전에 있었던 어딘가로 돌아감으로써 이미 떠나와서 만난 여행을 마무리짓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의, 누구에게나 예정된 부재를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평생을 남겨지는 쪽에 있다가 이제서야 남기고 떠나려니 어색해서 민망하기까지 하다.


  지금까지의 오늘은 늘 준비되어 있지 않은 채 왔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도 제때 내일이 되었다. 이런 하루하루의 관성에 지독하게 익숙해져 있는 탓인지, 내일이 없는 오늘을 떠올릴만큼 참신하지 못하다. 한번도 제대로 준비를 해 본 적이 없음에도 무언가 유난을 떨어야 할 것 같아 조급해진다. 또, 차마 다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들이 지금까지의 오늘을 만들어 주었고, 오늘은 다시 몇몇 순간만이 남아 무심하게 어제가 되어왔다. 편집에 가까운 망각은 자연스러운 것임에 분명할텐데도, 더 이상 오늘은 없고 어제로만 남게 될 내일이 괜히 공허하다. 한번도 모든 것을 기억해본 적이 없음에도 잊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만 같아 불안해진다.


  사실 이미 누군가의 부재로 가득찬 일상이다. 흔히 누군가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지만, 모두가 서로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이상 누군가가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 뿐이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 또한 내가 될 수 없기에, 나는 나만의 존재와 당신의 부재만을 느낄 것이고 당신 역시 반대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부재를 겪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많은 타인의 부재를 언제나 느끼면서도, 정작 자신의 부재는 스스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롯이 타인의 영역이다. 그래서 당장 앞두고 있는 자신의 부재가 스스로에게는 특별하거나 안타깝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럴 권리와 상상력을 갖고 있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렇기에 나의 존재가 부재하게 되었을 때 다른 이들에게 그리운 것으로 남도록 고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부재하는 이의 모든 것은 부재하기 직전의 시점의 것으로 고정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서로의 다름과 달라짐을 나누고 대화하며 각자를 더욱 또렷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이야말로 존재하는 자들의 특권이다. 반면 부재하는 이들은 다름도 달라짐도 가지지 못하기에 대화의 자격을 지니지 못한다. 부재를 앞둔 지금 즈음의 자신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그것을 전부 이해하지도 못한 채 스스로가 완결되어버리는 것만이 아쉽다. 이 아쉬움조차 어느 대화 속에서 그저 이야기거리로서만 존재하리라.


  이렇게 온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또한 마지막 밤과 함께 닫힐 것이다. 그래도 자의로 선택한 부재는 아님에, 기꺼이 살아내고 싶은 오늘들이었음에 안도할 뿐이다. 더이상 뒤늦게 깨달을 수 없기에 앞으로 부끄러울 일도 없을 테지만, 혹여 부끄러워야 마땅함에도 깨닫지 못한 것을 남겼을 것임에 면목이 없다. 그래도 최선의 일상은 아니었을 지언정 최선을 다한 일상이었다. 그리고 나의 부재 또한 누군가가 열심히 일구는 일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앎을 모르고 모름을 알 때 / 박브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