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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10. 2020

자전거, 여행 / 박브이

여행을 떠나요

  일본에서 지낸 유년시절, 흩어져 있는 기억의 사이사이에 부친의 검은색 자전거와 모친의 보라색 자전거 뒷자석에 앉아 바라보던 풍경이 있다. 손발을 마음 가는 대로 가눌 수 있게 되고 나서는 공원에서 네 발 자전거를 빌려 여기저기를 누비며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곤 했다. 보조 바퀴를 떼어내고 달릴 수 있게 된 순간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기념할 수 없어 참 아쉽다. 그래도 시골에서 살던 3년 여 동안 내 몸보다 큰 자전거를 타고 포도밭과 과수원 사이를 가로지르며 산과 계곡으로 모험을 떠났다. 서울에 올라오고나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일상에서 페달을 밟지는 못 했지만, 어딘가로 이동해야 할 때 가장 선호하는 수단이 자전거임에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갓 신입생 티를 벗고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을 때, 운이 좋게 기회가 닿아 학교의 지원으로 동유럽에 가게 되었다. 2주 남짓 동안 5개국을 돌아야 하는 빡빡한 일정 중에 단 하루, 뮌헨에서 온전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여행을 함께한 다른 일행들이 미술관과 박물관, 관광지를 알아보며 동선을 짜는 동안, 나는 자전거를 빌려주는 대여소를 검색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대여소가 있었고, 망설임없이 16유로를 주고 자전거 한 대를 빌리는 것으로 자유 일정을 시작했다.

  안주머니에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 한 장을 넣고 일단은 근처의 건물들을 구경하며 도로에 익숙해졌다.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어서, 현지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비가 오면 그대로 맞았고 그러다 다시 개면 물기를 말렸다. 도중에 도저히 이동을 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서 뮌헨 시장 안에 있는 커피 바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다시 도로를 천천히 달리다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마침 그 날 졸업을 한 학생들이 2층 버스를 통째로 빌려 자기네들의 마침표를 요란하게 축하하고 있었다. 박수를 치며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다섯배 쯤의 환호로 돌아왔다. 신호를 기다리다가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는 노년의 남성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싱긋하며 서로 눈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자전거로 퇴근을 하는 사람들에 섞여 달리며 대여소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호프 브로이에서 합류한 일행들과 그날의 모험담을 나눴다. 숙소로 돌아와 몸을 씻어내며 떠올리던 그 날 하루의 순간 순간들과 같은 것을 요즘에 와서도 종종 떠올리며 마음을 데운다.


  워킹홀리데이로 떠났던 일본에서도, 머물 곳이 정해진 다음 가장 큰 돈을 들여 장만한 것은 중고자전거였다. 기어 변동도 안 되는 작은 접이식 자전거였지만, 일상을 실어 나르기에는 충분했다. 7km쯤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직장을 거의 매일 자전거로 오갔다. 통근길에 지나치는 가이엔마에(外苑前)에는 은행나무가 멋지게 늘어져 있었는데, 잎잎 마다의 초록과 해질녘에 가장 빛나던 황금빛, 가지마다 쌓인 새하얌을 보며 지나가는 시간을 가늠했다. 남들은 출근을 앞둔 새벽에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길에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는 그 곳 벤치에 잠시 앉아 바뀌어 가는 계절을 독점하기도 했다. 쉬는 날에는 일부러 좁은 골목을 찾아 누비며 신경 쓰이는 가게들의 목록을 추가해 나갔다. 나의 작은 자전거는 별 다른 관리를 해 주지 않았음에도 진하게 보낸 1년 동안 잘 버텨 주었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직장 동료에게 대가 없이 건네주고 왔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칠 때 쯤에는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마침표 삼아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북쪽의 홋카이도와 남쪽의 오키나와를 고민하던 중, 어쩌다 TV CF에 나온 홋카이도의 아오이이케(青い池, 푸른 연못)에 빠져 직접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아오이이케가 있는 비에이(美瑛)역에 내려서 역 앞에 있는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성이 걸어다니던 언덕과 같은 배경 속을 자전거로 달렸다. 아오이이케는 물론 '켄과 메리의 나무', '크리스마스트리 나무,' '세븐스타 나무' 등 이름이 붙어 있는 유명한 풍경들은 예술작품을 실제로 보았을 때와 같은 일종의 압도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 언덕 위에는 또 어떤 이름없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기대하며 있는 힘껏 페달을 밟는 재미가 있었다. 덕분에 그날 묵은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 곯아 떨어졌지만, 언젠가 다시 내 눈에 그 풍경을 담아내리라고 늘 생각한다.


  요즘들어 다시 일상에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걸어 다니거나 버스와 차에 타서 보던 거리의 모습은 자전거를 탔을 때의 높이와 속도에선 꽤나 다르게 눈에 비친다. 걸으면서는 볼 수 없던 담장 위의 해바라기가 보이고, 습한 공기를 내리막길의 시원한 바람으로 말릴 수 있기도 하며, 처음 가보는 길에 기대를 더한다. 어쩌면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렇듯 여행을 일상과 가깝게 만들어주고 다시 일상을 여행처럼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장마가 멎어간다. 다시 페달을 밟을 때다. 일상을 여행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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