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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23. 2020

모두로서의 브이 / 박브이

필명의 기원

  브이를 처음 만난 것은 방학을 앞두고 어수선해진 고등학교 교실에서였다. 재미있게 보았던 <매트릭스> 시리즈의 제작진이 참여했다는 것과 좋아하는 배우였던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으로 나온다는 것만 알고 있는 상태로 <브이 포 벤데타>를 보았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있는 영화이기도 했고 여러 번의 산만한 수업시간에 걸쳐 나누어 보아야 했었기에 집중해서 보기 어렵기도 했어서, 사실 당시에는 특별한 인상으로 남진 않았다. 그저 영화의 시작부터 자주 반복되는 'Remember, remember, the 5th of November'라는 대사의 운율과, 어딘가 기괴한 매력이 있는 가이 포크스 가면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어린 학생이라는 이유로 뭘 몰라서 하는 생각이라는 취급을 받아야 했던, 규칙과 규율로 포장되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의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브이와의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 두 번의 입시에서 실패를 겪었다. 자연스레 스스로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도 이 때 즈음이었다. 장래를 묻는 질문에 고민의 무게가 더해졌다. 어느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고 싶은지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디에 위치하고 싶은지가 스스로의 일부만이라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엇으로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지에 대한 해답을 당장 찾을 수는 없었다. 흔들리지 않기에는 가지고 있는 기준이 모호했고, 겪어 보지 못한 무언가를 상상하기에는 경험이 너무 얕고 적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지조차 못했다. 이 시기 이후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막연히 '나는 내가 되고 싶다'고 괜히 있는 척 했던 대답은 시시한 농담이었을 지언정 거짓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는 내가 알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학기와 학년이 바뀔 때의 교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권이 바뀌고 나서의 거리와 광장은 심하게 어수선했다. 폭력과 저항이 교차하던 시위 현장에는 각자의 신념과 이념이 고함소리에 뒤섞여 충돌하고 있었다.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한 충격과 실망, 조롱과 안타까움 역시 서로를 긋는 금을 더욱 진하게 덧칠했다. 그 와중에 각자의 옳음과 서로의 그름을 외치고 있지만, 정작 그래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위화감이 있었다. 틀리지 않은 각자가 서로 다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서로 같지 않음이 문제될 리 없다. 서로의 다름이 있기 위해서는 서로가 공유하는 옳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 공통의 옳음이 없기 때문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몰아 세우기보다는 그 이전에 있어야 할 모두의 옳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의문은 스스로는 어떤지를 생각하기에는 아직 정리된 언어를 갖지 못했던 때에 가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동네 도서관에서 브이와 재회했다. 자유에 대한 책임, 방관을 강요하는 공포, 개별성에 대한 존중, 예술의 가치 등을 장황하지 않게 압축하고 있는 그의 말은 그가 던지는 단검만큼이나 날카로왔다. 그러면서도 그가 추던 춤처럼 차분하면서도 우아하고 재치있는 말투에 담겨진 메시지에는 내가 고민해왔던 '모두에게 옳은 것'에 대한 단서가 실려 있었다. 바로 모두가 온전한 모습의 각자로서 존재함과 동시에 그런 서로와 함께 하는 것. 이런 관점에서 보면, 통제로서만 존재하는 시스템이 파괴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미 그 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불타버려 온전한 스스로로서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투하는 모습은 숭고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브이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브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속 세계관 만큼이나 극단적이었던, 그가 이비에게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그런 행동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던 신념 자체에 대해서만 우선은 집중하기로 한다.)


  그로부터 약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브이를 필명으로 삼은 것은 여전히 브이가 되고 싶다는, 혹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 정도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기에는 개인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해버렸다. 그 동안 여전히 옳은 것에 대한 고민에 답을 내리지는 못했고, 서로의 다름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버렸으며, 스스로에 대해서도 대충의 짐작은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수월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달라지고 있다고 믿는다. 늘 2014년에 머물러있는 4월 16일을 기억하고 있고, 권위와 권력이 목적이었던 사람들이 우리를 대표하도록 방관한 대가가 불안과 불신이었을 지언정 좌시하지는 않았다. 어느날 광장에서 각자의 촛불이 저마다의 얼굴을 밝혀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침내 의사당 건물이 폭파되며 만발하던 불꽃이 브이의 가면을 벗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는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모두 브이가 되어봤다. 그렇기에 다시 모두가 브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필명에 담았다. 불꽃놀이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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