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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25. 2020

아버지라는 이름의 팔레트 / 박브이

당신의 조각들

  자주 오가는 곳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인사를 건네는 편이다. 부끄러움이 섞인 가벼운 목례나 민망함을 자아내는 무시로 되돌아올 때도 있지만, 인사를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에 익숙해졌다. 고기집에 가서는 고기를 주로 고기를 굽는 편이다. 언제부턴가 집게와 가위를 쥐는 편이 자연스러워져서 자청하게 된다.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버릴 데가 없어서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까먹고 온 방 안이 꽁초 냄새로 진동을 했던 적도 더러 있다. 누가 뭐라든 특정한 생활방식이나 취향을 고수하는 편이기도 하다. 한동안 아무도 쓰지 않는 브랜드의 휴대폰만을 고집하기도 했다. 내 첫 스마트폰은 노키아였다.


  부친 역시 그런 편이다. 구청장 까지는 힘들더라도 동장 정도는 거뜬할 것이라며 농담을 할 정도로 동네방네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고기를 특히 좋아하기도 해서 굽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집게와 가위를 맡기지 않는다. 담배를 피게 되고 나서 수없이 맞담배를 핀 적이 있지만, 부친이 꽁초를 재떨이가 아닌 다른 곳에 버린 것을 본 적이 없다. 주변 사람들이 조금 불편해 하지만 온갖 설득에도 불구하고 구형 핸드폰을 몇 년 째 사용하고 있다. 신발장에는 늘 시골 시장에서 사 온 하얀색 고무신이 놓여 있다.


  당연하리만큼 자연스러운 닮음이지만 어딘가 신기하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늘 부친과 함께하지는 못했다. 간신히 기억이 닿는 여섯 살 즈음에는 학업이 남은 부친을 일본에 두고 모친과 그 배 속의 동생, 셋이서만 귀국을 했다. 부친이 뒤늦게 귀국한 다음에는 시골에 집을 얻어 3년 정도를 함께 살았다. 그러고 나서는 나의 학업 문제와 부친의 직장문제가 엇갈려 8년 가까이 주말에만 부친을 볼 수 있었다. 중요한 판단의 순간이나 조언이 필요할 때는 충분한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내가 사는 집에 부친은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적이 있었을 만큼 그가 차지하는 물리적인 시간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집요하게 아버지라는 팔레트에서 좋아하는 색을 찾아 스스로를 칠하는 존재다. 늘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부친의 모습을 따라하다 보니 '안녕하세요'라는 말의 울림과 온도를 좋아하게 되었다. 불판에 깔린 고기를 뒤집어가며 알맞게 구워내는 것이 재미있어 보여서 언젠가는 저 집게와 가위를 내가 움켜쥐리라 다짐한 적도 있었다. 담배꽁초를 버릴 데가 없어 손에 꼭 쥐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 사람과 결혼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모친의 이야기는 괜찮은 사람에 대한 설화처럼 집안에 전해진다. 고무신을 신고 폴더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알기 쉬우면서도 어딘가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있는 것도 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스스로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부친의 색은 생각보다 진하다.


  부친 역시 지금도 그 나름의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는 도중이기에 내가 아직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색 역시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의 팔레트에서 맘에 드는 색을 골라 스스로를 칠해 가리라. 그리고 언제가 부친의 그림이 완성이 되었을 때, 그때까지 스스로에게 칠한 수많은 각각의 색은 그를 기억할 파편이 되어 줄 것이다. 언젠가 인사를 건네기 위한 어색함을 감당할 용기가 필요할 때, 고기를 더 맛있게 굽고 싶을 때, 담배 꽁초를 바닥에 내던지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 스스로가 고집하는 어떤 취향에 남들이 고개를 저을 때 나는 아마 다시 부친의 색을 덧칠 할 것이다. 네 살 남짓의 나를 부둥켜 안아주던, 서른의 부친은 어떤 색으로 칠해져 있었을까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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