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Oct 24. 2020

조각은 조각을 타고 / 이루시엔

내 안의 조각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족 내에서 나와 엄마는 항상 극과 극을 달린다. “넌 왜 엄마가 하라고 하면 ‘싫다’부터 하니”와 “엄마가 내가 싫어하는 걸 강요해도 끝내는 내가 엄마 말대로 하는데 왜 자꾸 뭐라고 해”는 말다툼이 일어날 때 마다 나오는 단골 멘트인데, 서로의 청개구리인 탓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사소한 것부터 어느 하나 제대로 맞는 게 없다. 옷이나 음식 등 취향부터 정리정돈 스타일, 삶을 대하는 방식, 슬픔을 잊는 방식, 대화 방식 등 대부분이 엇갈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삐대고 있다. 그 가운데 내심 엄마에게 서운한 일이 켜켜이 쌓여 ‘난 저러지 말아야지’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외치곤 했다. 엄마와 다툰 딸들이 마음 속으로는 한번씩 내질렀던 말을 나라고 피할 재간은 없었다.


  옛말 틀린 것 없다. 아무리 다짐을 해도 딸이 엄마를 닮지 않을 재간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혼자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 내 안의 엄마의 조각을 봤다. 밥을 먹고 테이블을 치울 때면 귀 저 안쪽에서 엄마 잔소리가 들렸다. 행주질은 이렇게 원을 그리면서 해야지. 방청소를 할 때면 엄마가 청소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카락은 이렇게 휴지로 뭉쳐서 버려야지. 옷을 입을 때도, 한 걸음 내딛을 때도 그렇게 잔소리라 여겼던 일들이 하나의 율법이 된 듯 난 엄마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백화점에서 엄마가 조금이라도 물건을 싸게 사기 위해 하는 말조차 내가 똑같이 따라하고 있는 걸 스스로 발견하고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집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반대로만 하려고 했었는데, 막상 혼자 지내려고 하다보니 엄마의 말에 뿌리를 박아야지만 살 수 있던 사람이었다.


  특히 사람을 대할 때 난 또 엄마의 조각을 본다. 누구와 가까워질 때 나도 모르는 새 엄마의 기준이 조금씩은 담겼다(아직 완전히 담기지는 않더라). 누군가를 아낄 때는 내 모습에서 또 헌신적인 엄마를 발견한다. '내가 네 아빠네 처음 갔을 때, 책에 쌓인 먼지들 평생 털어주고 살아야지 했다가 지금도 하루종일 먼지만 털고 있다'는 엄마. 그런 엄마는 두 딸이 각각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서른을 향해 달려가는 길목에 있어도 지하철 타러 가는 길이 힘들지 않냐며 오늘도 묵묵히 차키를 꺼내 바래다준다. 밤 귀가가 늦을 때면 먼저 잠을 청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내가 엄마의 조각을 발견하며 살 듯 엄마는 어떤 조각을 품었길래 그러나. 역시 엄마도 엄마의 조각을 품고 사는 것이더라. 외할머니가 이년 전 세상을 떠나신 이후 엄마는 그 조각을 더 자주 꺼내서 본다. 부쩍 '네 할머니는~'으로 시작하는 말이 많아졌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조각을 마지막 오아시스처럼 붙잡고 사신다. 대학교 다닐 적 잠시 인천 외할머니댁에서 통학한 적이 있는데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내가 집에 안오면 버스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꼭 엄마를 닮았다.


  양식이 귀할 적, 너는 커서 포크로 된 음식만 먹고 살라며 엄마의 젓가락질이 서툴어도 크게 신경 안쓰셨다는 외할머니의 말은 엄마가 내 서툰 젓가락질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도 언젠간 지금의 엄마처럼 엄마의 조각만을 꺼내서 보고 쓰다듬고 품어야만 살 날이 올 것을 안다. 아무리 청개구리여도 결국엔 엄마로 수렴할 것도 안다. 그렇게 조각은 조각을 타고 또 나의 미래에 심어지게 되겠지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성, 그리고 글: 동경의 집합체 / 이루시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