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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30. 2020

무관심의 미학 / 이루시엔

내 삶의 에어백

  누군가 ‘어떤 관계가 이상적인가’라고 묻는다면 ‘잠식당하고 잠식하는 관계’라고 답하겠다. 어디선가 본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라는 시 구절이 마음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온전히 내어주는 그런 관계를 좋아한다. 서로 지금쯤이면 이러고 있겠거니,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사람이 좋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게 착각일지라도 내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징이자 기준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건 자라나는 관심이다. 관심이 많을수록 겹쳐지는 부분은 많아진다. 온갖, 온 사람이 다 궁금한 관심투성이인 부류는 아니지만, 친해지고픈 사람이 있으면 어김없이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관심을 줬다. 그게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자 네 옆에 있고 싶다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단짝친구의 집 주소를 외우고 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시간 속에 마모된 게 있다면 그 또한 관심이다. 밀물처럼 밀려왔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어김없이 밀려갈 때면 그동안 흩뿌렸던 관심을 주워오는 게 고된 일인 걸 알게 됐다. 뒷일을 생각 않고 너른 모래사장에 뿌려놨던 조가비를 혼자 주워 담는 것만큼 텅 빈 일도 없었다. 관심으로 쌓았던 상대방 흔적을 내 안에서 발견할 때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타블로가 가사에 쓴 ‘써 내려간 기억에 살만 붙어서 미련만 커지고 잘 참다 끝내 무너진 그 순간’도 다 관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느 순간 무관심을 에어백으로 두게 됐다. 왜 너는 나만큼 내게 관심을 쏟지 않냐며 투덜거릴만한 사람에게는 일부러라도 관심을 거두게 된다. ‘남 걱정할 시간에 나나 잘살자’는 거다. 관심으로 쌓아 올린 상대방과의 교집합을 줄여야 한다는 뭔지 모를 책임감까지 있다. 관심 가질 시간에 내 삶이나 살자는 노력이 성공한 건지, 아니면 아직 부족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얘는 원래 자기 일 아니면 관심이 없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런 말은 내게 썩 기분 나쁜 말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관심 가지는 게 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끝난 인연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 누군가의 SNS를 염탐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모든 물건을 치우는 것도 무관심이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의 연장선상이디. 멀어진 친구의 근황조차 묻지 않고 프로필 사진을 보지 않는 것도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서운한 일을 막는 일이다. 더 관심을 가졌다가는 뭔가 나만 밑지는 기분은 싫다. 허공에 떠돌 관심을 내가 뭐라고 쏟고 있지 싶은 느낌이다.


  누군가의 삶에 관심이 없다는 건 반대로 내가 기대하거나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나만 신경쓰면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샌가 무관심이 평온한 상태가 돼있다. 관심을 끊음으로서 앞으로 받을 수도 있는 충격을 상쇄한다. 무관심의 미학이다. 그런 평온한 상태를 누군가 뚫고 들어오려고 하면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시 마주보게 된다. ‘이 피곤할 일을 다시 할래?’ 누군가 외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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