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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21. 2020

마성, 그리고 글: 동경의 집합체 / 이루시엔

필명의 기원

  재미있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영화였다. 태평양 건너 있는 나라의 문학 사조는 더더욱 모른다. 그런데도 영화 <킬 유어 달링(Kill Your Darlings)>에 끌린 건 순전히 제목과 등장인물 데인 드한 때문이었다. 세련된 옷차림을 한 데인 드한과 배우들이 있는 무언가 빛바랜 느낌의 포스터와 귀퉁이에 쓰여 있는 ‘날 위해 아름다운 글을 써줘’ 문구에 홀렸다.


  영화를 켠 순간 심적으로도, 외관으로도 꽤 어지러웠다. 재미있지 않지만 끌렸고 유쾌하지 않지만 인상 깊었다. 글, 천재성, 사랑, 마약, 파티, 정치, 동성애, 살인. 나올 수 있는 모든 자극적인 소재는 날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결핍으로 이끌었다. 이 영화와 데인 드한이 맡은 역인 루시엔 카는 도달하고 싶은 곳이었다. 용기도 재능도 매력도 그저 그런 현실에서 루시엔 카의 천재성과 마성은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러닝타임 내내 퇴폐적인 눈빛을 내뿜는 데인 드한에 매료된 건지, 루시엔 카라는 캐릭터에 푹 빠진 건지 아직도 헷갈린다. 그만큼 배우가 캐릭터 그 자체가 됐던 것이라 생각한다. 루시엔 카는 훗날 비트 세대를 이끄는 대표적인 작가가 되는 앨런 긴즈버그와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우즈의 치명적인 뮤즈로 나온다(이들은 다 남자다). 뮤즈가 될 정도로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주고 어떤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게 무슨 기분일지 영화 보는 내내 상상했다. 루시엔 카는 그를 뮤즈로 삼은 이들을 모두 천재 작가로 만들었다.


  그래서 루시엔 카가 좋았다. 누군가를 홀릴 정도의 매력을 갖고 있고(물론 결국 자신을 스토킹한 남자를 살해하게 되지만), 나약해 보이지만 강단 있고,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한 게 부러웠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난 주로 홀린 쪽이지 홀리는 쪽은 아니었다. 어느 관계에서나 안절부절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홀리는’ 캐릭터에 더 빠져들었다. 홀리는 매력은 원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 수 있는 지름길로 이끈다. 곧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캐릭터가 되고 싶어졌다.


  영화를 볼 당시 내게 차 있던 글에 관한 동경도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싶어서 한창 글 연습을 하던 2015년에 본 영화였다. 비트문학 사조를 배경으로 삼는 영화인 만큼 글에 관한 내용이 영화 중간에 계속 나온다. 특히 제목이자 영화 대사로도 언급되는 ‘킬 유어 달링’. 사전적인 뜻으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라’도 되지만, 글을 쓸 때는 ‘네 사적인 감정은 죽여라’가 된다. 글쟁이를 꿈꾸던 사람으로서, 훗날 천재 작가들이 된 그들이 말하는 글쓰기 원칙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대단한 글쟁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사적인 감정을 죽이고 글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해도 전체적인 글 흐름을 해친다면 과감히 없애라는 뜻인데, 글로 옮기는 한글자 한글자는 모두 내 자식 같아서 지우기까지 꽤 여러 결심을 해야 하는 탓이다. 이 기분을 알기에 사적인 감정을 죽이고 글을 쓰라는 영화 대사를 듣고 있노라면 ‘같은 글쟁이’가 되고 싶었던 그때의 난 무언가 대단한 글쟁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잠시 빌려올 수 있었다.


  동경으로 점철된 영화였다. 루시엔 카의 예명을 빌려서라도 누군가의 뮤즈가 되고 싶었고, 천재 작가들과 글에 관한 신념을 논하고 싶었다. 영화 속 대사를 빌려 내가 꼭 찾던 캐릭터를 봤을 때의 기분을 말한다. ‘Finally, an oasis in the wasteland(드디어 사막에 오아시스가 나타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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