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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07. 2020

비일상 속 일상 / 이루시엔

여행을 떠나요

  #.조금은 습한 여름 밤바람을 느끼며 친구와 이어폰은 한 쪽 귀에 나눠낀다. 이어폰에는 여느때와 같이 좋아하는 발라드 음악이 나온다. 성시경 노래들이었나. 밤 거리를 따라 걸으면 눈 앞에는 펼쳐지는 로마의 천사의 성, 그리고 노란 불빛. 맞다 여기가 이탈리아였지, 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관광객과 외국인이 삼삼오오 모여 천사의 성쪽으로 걷는 숱한 발걸음들이 보인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려고 고개를 돌리면 바로 옆에 보이는 다리 난관에 수 놓아진 베르니니의 조각들까지. 감탄사를 뿜어내다가 다시 친구와 실없는 장난에 몰두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파리 거리에 나가니 벌써 시간은 밤 9시가 다 되어간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맛집을 찾아보지만, 주택가에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작은 가게에 한국인의 생생한 후기가 있을리는 없다. 맛있는 냄새를 킁킁거리며 따라가보니 나타난 건 작은 피자 가게. 동생과 급하게 한자리 남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주문을 시켜 허겁지겁 먹는다. 고작 몇시간 지났다고 파리 한 가운데에서 동네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프랑스인들과 한 공간에서 피자를 먹고있다니. 귓가에 살짝씩 들어오는 프랑스어 억양과 영어가 섞인 소리.


  #. 시원한 여름 밤바람을 맞으면서 걷고 있는데 옆에 보이는 건 세느강이다. 한강의 웅장함과 달리 세느강의 단촐함은 느낌이 묘하게 다르다. 만난지 얼마 안됐지만 같이 아는 친구를 공통점 삼아 친해진 친구와 수다를 떨다보니 시간은 벌써 새벽 1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와인 한 병을 부랴부랴 산 종이컵에 따라 맥주처럼 마시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에펠탑이 하얗게 반짝인다. 노란 불빛에 빠져있는 도시가 파리라지만 이때만큼은 암흑 속의 백(白) 그 자체였다.


  일상과 비(非)일상이 섞이는 게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여행을 다녀왔지만 눈을 감으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여행의 기억은 다 이런 순간이다. 장관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린 적도 없고 한국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을 겪은 것도 아니다. 여느때와 같이 친한 친구 또는 가족과, 들었던 노래를 또 듣고, 좋아했던 노래를 듣고, 수다를 떠는데 그게 낯선 곳일때의 느낌이 좋다. 익숙함 속 익숙하지 않음을 느낄 때, 아 내가 여행을 왔구나, 라는 게 새삼 느껴진다.


  예쁜 풍경을 보고 있는데 고개를 돌리면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서있는 기분. 익숙한 음식을 먹고 있는데 주변을 살펴보면 다른 인종의 사람들. 생소한 거리를 걷고 있는데 이어폰에서는 항상 들었던 음악. 낯섦을 두려워 하는 내가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낯섦을 오로지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다.


  되돌아보면 내게 기분좋은 익숙함을 선사해줬던 건 같이 여행을 간 동행자였다. 나의 일상을 알고 비일상의 감상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낯섦이 강할 때는 익숙했던 이야기로 긴장을 풀어주고 익숙함에 지겨울 때쯤이면 다시 같은 장관을 보며 낯섦의 소회를 밝힌다. 어색함이 최대의 무서움인 내게 익숙한 동행자들은 그 어떤 낯선 공간에 떨어져도 그 공간에 압도당하기보다 내가 두 발로 공간을 하나하나 곱씹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나는 쉴 수 있을 때마다 익숙한 사람들과 낯선 공간으로 떠나는 상상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여행가자'는 말을 누군가에게 건넨다는 건 내게는 곧 같이 일상 속 비일상, 비일상 속 일상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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