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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24. 2020

숨은 그림 찾기 / 우드수탁

내 안의 조각

  정세랑 작가님의 ‘시선으로부터’라는 책을 덮고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근에 동생 입시 문제로 여러 번 통화를 하긴 했지만, 용건 없이 전화를 건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동생이 요즘 학교를 못 가니 늦잠만 늘었다며 걱정 한 보따리, 이 놈의 코로나는 언제 끝나냐며 투덜 한 보따리를 풀고 나서는 집 오면 무엇이 먹고 싶냐 물었다. 글쎄, 난 다 좋아라며 엄마는 별 일 없냐고 묻자 그래도 추석 때 오기 전에 먹고 싶은 거 정해서 알려달라며 재촉한다. 알았어, 생각나면 카톡 보내놓을게 라고 겨우 대답하자, 곧 피곤하다며 바쁜데 전화해줘서 고맙고 사랑해라는 마무리 인사를 하고 끊는다. 엄마가 나보다 더 피곤하고, 바쁠텐데도 항상 마무리 멘트는 같다.


  ‘시선으로부터’라는 소설은 돌아가신 어머니인 ‘시선’을 회고하며 시작해 돌아 돌아 결국 자녀들의 삶에서 끝을 맺는다.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불만도, 그리고 각자 상처도 있지만 이내 모여 각자만의 방법으로 ‘시선’을 추억한다. 마지막 즈음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이 문장을 읽고 처음으로 부모님과 내면의 연결 고리를 찾고 싶어졌다. 항상 부모님의 눈을 닮았네, 코를 닮았네 하며 바깥의 모습에서 찾아본 적은 있지만, 마음 안 속 닮은 점을 곰곰이 떠올려 본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가끔 사소한 행동에서 엄마나 아빠와 똑 닮은 나를 마주치곤 놀란 적은 있지만 깊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예전엔 ‘엄마아빠랑 나는 달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저게 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했고 아빠의 무뚝뚝함을 보며 무뚝뚝한 남자는 만나지 않을꺼라 다짐했다. 분노에 차있던 사춘기를 지나 단어 하나 조심해야 하는 사회인이 되고 보니, 이 모든 시절을 지나온 부모님이 대단해 보였다. 아빠는 대체 어떻게 인천에서 서울까지 매일 출퇴근을 했던건지(심지어 그 때는 주 6일제였다), 엄마는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나를 낳고 키워냈던건지 그저 히어로 같았다. 이제 ‘엄마아빠랑 이런 게 진짜 닮았어’하며 찾아낸 모습은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근거가 되고,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진주에서 인천으로 올라와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적응해 나갔다. 아침에는 떨어지기 싫어 우는 딸내미와, 오후에는 중2병 걸린 학생들과 씨름하며 가정의 숨은 수장으로 살아 왔다(지금은 대놓고 수장이다). 아빠는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며 출퇴근하고, 회사에서 갖은 꼴을 겪으며 가장의 삶을 살아왔다. 나 또한 회사원이 되고 보니 몇 십년 같은 회사에서 버텨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뼈저리게 느껴지고, 그만큼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지금도 새로운 일을 찾아 다니는 아빠가 가끔 속 터질때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 열정이 대단하다.


  과거의 나는 부모님과 틀린 그림 찾기를 했다. 부모님과 내 모습에서 틀린 그림을 찾아내면 개성이라고 자만했다. 지금은 부모님과 닮은 그림을 찾아내는 것이 즐겁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조각, 그래서 배우고 싶은 조각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에겐 닮은 그림 찾기보단 숨은 그림 찾기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엄마아빠의 아름다운 조각들을 따라가고 싶다. 그 조각들이 내 안에서 힘이 되어주고, 그 힘을 누군가에게도 나눠줄 수 있을 때까지 언제나 내 곁에 두고두고 함께 있어주기를 어쩌면 철없는 소원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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