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Nov 14. 2020

고민과 행동, 엇박자 / 이루시엔

서른 즈음에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는 편이지만 그 생각은 으레 ‘나 잘되라고’에 관한 것들이었다. 좋은 학교에 가려면 높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취직을 잘하려면 열심히 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것들. 한 마디로 어린 아이가 돈이나 집안 사정 얘기에 끼어들라고 하면, 어른들이 “너는 아무 생각 없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그게 효도하는 길이다”라고 말하는 그런 류다. 좀 어려운 고민이라고 하면 인간관계인데, 마음 맞는 친구 몇을 의지할 수 있는 복까지 있어 순조로웠다. 이를 근 30년간 체화해서 그런지 내 생각이 미치는 최대치는 이 언저리였다. 제 스스로 어느 정도 노력하고 기를 쓰면 해결되는 고민이 머릿속을 차지한지라 나는 나만 신경 쓰면 됐다.


  요즘 서른은 아직도 애라고 한다. 켜켜이 쌓여가는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꽤 촌스럽다. 그렇지만 서른을 두 달 반 남짓 남겨둔 이 시점에 마냥 애처럼 굴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나만 생각한 고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말이다. 익숙하지 않지만 내 고민의 영역이 가족과 직장,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가족까지 뻗쳐 나갈 때면 머리가 가볍게 지끈거림을 느낀다. 챙겨야 할 게 많아지고 있다. 내 경력과 자금은 물론 부모님의 건강과 집 경제 상황, 친척들 다툼, 앞으로의 나의 미래 등등 일이 년 전만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까지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주변에서도 넓혀진 고민을 품고 살아가며 저마다의 답을 내놓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주변에서도, 특히 부모님이 내가 슬슬 나만의 답을 내놓기를 바라는 게 느껴진다. 그럴때 마다 이석원 산문집에 나 와있는 문장 ‘내게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혼자서 조용히 자신만의 화단을 가꾸는 일. 천천히 가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를 되뇌어본다. 나 이제 서른인데, 어쩔 거야. 그래도 막상 옆에서 이미 내가 생각한 어른이 돼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누군가 어른의 기준을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내가 어른에 가깝지 않다는 걸 알기에 서른이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럽게만 느껴진다.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골치가 아픈 일은 꽤 직전까지 미뤄놓는 성격이다. 그 와중에 한번 시작만 하면 어느정도 해낸다고 자위하지만, 미리미리 처신하는 게 여간 쉽지 않다. 누구는 네 나이에 집을 사고, 어디에 투자해서 부모님께 차를 사드리고, 누구는 직장을 어떻게 옮겨서 연봉이 얼마고, 운전은 하고 다니는 거냐, 누구는 결혼해서 벌써 애를 낳더라 하는 부류의 말들이 마냥 편하지가 않다. 지금까지는 잔소리는 듣기 싫다며 이불속으로 들어가 버리기 일쑤였는데 슬슬 잔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이라 숨어버리기도 머쓱하다.


  요즘은 내가 어른인 척을 하고 사는 것 같다. 주변에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저마다 각자 세워놓은 서른 이후의 삶을 자랑스레 말하는 지인을 만나면 별 관심도 없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괜히 뒤떨어져 보이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서른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철이 완전히 들지 않았다는 걸 들키지 민망해서일까. 말하면서도 때로는 이런 내 모습이 웃기기도 한다.


  잘 모르겠지만, 뭐가 뭔지 모르는 것 자체가 서른을 맞는 내 이십대 끝자락의 머릿속의 날 것이다. 머리로는 아는 게 많아지고 눈으로 보는 것도 많아지는데 의젓하게 행동하는 건 아직 꽤 어렵다. 요즘엔 작은 것부터 챙기며 한발 한발 나아가려고 애도 쓴다. 그러나 머릿속에 있는 고민을 부지런히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면 아직은 어색하고 엇박자가 나는 건 또 왜일까. 모르겠지만 더는 미룰 수 없으니 그래도 해야지. 다짐 또 다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일년은 언제나 가을 겨울 봄 여름 / 이루시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