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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Nov 19. 2020

사탕이 된 이유 / 이루시엔

좋은 친구의 모습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다는 거다. 자연스레 고민의 답도 스스로 알게 된다. 때로는 이게 더 괴로울 때가 있다. 답이라도 모르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몰랐으니까’라도 되는데, 지금은 알면서도 독약을 마시는 기분을 느낄 때가 꽤 있다. 그러면 마음속에 독이 쌓이고 독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전화기를 든다. 목적지는 나를 제일 잘 알 것 같은 친구다.


  사람은 자기 기준대로 생각한다. 역지사지도 물론 자기 위주다. 그래서 주로 친구가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낼 때 공감을 먼저 해주는 편이다. 친구가 품은 고민의 답은 이미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지금 감당하기 힘든 일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 나를 찾지 않을까 한다. 교과서에 적힌 답안지 같더라도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일이 많다. ‘힘들었겠다’를 여러 번 반복할 무렵, 상대방은 ‘나도 잘못된 걸 안다’고 이야기한다. 아는 이야기 괜히 또 하고 싶지 않은 게 컸다.


  친구에 대한 공감과 지지 아래에는 ‘내가 뭐라고’가 깔려있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바르게 행동한다고 또 내가 얼마나 똑 부러지게 결정을 내린다고 누구에게 결정을 채근한단 말인가. 내가 만약 저 상황에 부닥쳐 있으면 내가 상대방에게 조언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겠냐는 자신의 물음에 계속 작아지는 탓이기도 하다.


  말을 물가에 끌어다 놓을 순 있어도 물을 마시는 건 본인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어떤 조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생각하고 결심하는 건 친구일 거라는 생각에 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킬 때가 많다. 듣기 싫은 말을 입에 올리는 용기도 조금 부족한 탓도 있다.


  무엇보다 친구에 대한 내 무조건적인 공감에는 앞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있다. 불안감이라고 하기까진 과할 수 있지만, 사람은 본능적인 동물이라 듣기 싫은 이야기는 어떻게든 점점 피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나 잘되라고 하는 건 알지만 심해지면 방문을 닫듯, 친구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그래서 따끔한 조언 대신에는 우선 공감을 택하는 편이다. 입안에서 녹는 사탕만은 되고 싶지 않지만 우선 사탕이 돼야 힘들 때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싶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친구의 편이 된 변(辨)이다.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공감을 갈구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답정너’라는 핀잔을 듣게 돼도 당장 힘들 때는 재간이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솔직히 답답할 때도 많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직설적으로 조언을 할 수 있는 이들의 용기가 부럽다. 누군가의 결함을 찾아내 어떻게든 꼬투리 잡으려는 것이 아닌, 정말 아닌 일에 아니라고 말하고 결심을 단호하게 만들어 줄 조언을 하는 게 힘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공감에 대한 가치를 위에 쭉 나열해왔지만, 사탕 역할을 하면서 ‘이게 아닌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혹여나 나의 공감이 친구가 걸을지도 모르는 ‘가시밭길을 응원하는 셈이 되면 어쩌지’가 된 수많은 노심초사의 밤이 있다. 나중에 왜 그때 제대로 조언해주지 않았냐고 원망의 소리를 들으면 어쩌지 싶은 나날들이 있다.


  칼로 두부 자르듯 무엇이 바르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면도 저런 면도 적당히 섞인 게 좋은 친구의 자질임을 안다. 이 글로 오늘도 한번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어디에 가까운 사람인가. 혹여나 나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쓸데없는 응원이나 용기가 되진 않았을지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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