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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Nov 25. 2020

터널 사진 / 이루시엔

사진 같은 순간

  원래 쓰려고 했던 글은 따로 있었다. 내 생에 멋진 순간이 언제였더라, 친구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순간이 언제였더라 하며 기억 저편을 끌어올릴 셈이었다. 벅찬 기분을 느끼기 위해 발제한 주제였다. 멋진 희극인 박지선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피부병으로 인한 고통의 도피처로 내린 결론이었다고 한다.


  박지선씨의 죽음 이후 내게 닿는 미디어는 온통 그의 이야기였다. 덕분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피부병으로 인한 증상이나 고통은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여드름으로 인해 고등학교 때 피부과 시술을 받았고 그 이후 얼굴이 눈코입 빼고 모두 수포로 뒤덥였다고 했다. 이후 햇빛만 봐도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피부로 인한 고통으로 학업은 물론 직업에도 지장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피부 통증으로 개그맨에게 필수라고 하는 분장도 못 했더랬다.


  그러면서도 영상 속 그는 지금은 어느 정도 극복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여러사람에게 내뿜을 수 있게 됐다고 웃었다. 댓글에는 ‘긍정적인 지선씨가 이런 선택을 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슬프다’라는 내용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나는 충분히 ‘믿기었다.’ 그리고는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사진으로 매일매일을 찍어 기록까지 남긴,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던 2014년이었다.


  조금 더 깨끗한 피부를 욕심내던 내 심보가 문제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거울 속에 괴물이 하나 서 있었다. ‘눈코입 빼고 모든 게 수포로 부어올랐다’라는 말 그대로였다. 세수를 해야 하는데 닿는 곳마다 통증이다. 비누칠은커녕 물에 얼굴을 댈 수도 없다. 내 앞에 놓인 건 당장 내일의 출근, 그것도 나름 경쟁을 뚫고 사회인으로 향하기 위한 첫발인 인턴십이었다. 인턴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전화기를 들어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취소했다. 화농성 여드름 정도로 생각했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의 말에 그냥 전화를 끊었다.


  수포가 가라앉기까지 근 1년이 걸렸다. 독한 스테로이드 약을 쓰면서 부어오르는 얼굴과 몸뚱이, 시뻘게진 피부를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해 움츠러드는 고개, 양·한약을 다 써봤지만 차도가 없는 얼굴, 처음 보는 사람이 묻는 ‘피부는 왜 그러신 거예요’라는 말에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그 와중에 또 좋아하는 사람은 생겨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부조화까지 겹쳐 온 세상의 불행이 내게 닥친 듯했다.


  긍정적인 일이 세 번 일어나면 부정적인 사람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부정적인 일이 세 번 생기면 긍정적인 사람도 부정적으로 된다는 말을 믿는다. 병이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경미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복용하는 약은 시도 때도 없이 잠들게 했다. 그런데도 우중충한 사람이 되기 싫어 오히려 피부병을 친구들 앞에서 개그 소재로 삼고 친구가 찍어준 입 주변이 벌겋게 부어오른 사진을 엽사라고 넘겼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펑펑 울기 일쑤였다. 그 해, 나의 삶은 빠져나올 수 없는 긴 터널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때 아침과 밤에 수포가 잡힌 얼굴을 매일 촬영했다. 부디 오늘은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길 바라면서. 숨 쉴 때 마다 빈 기도 덕이었을까 사람 몸의 면역체계의 신비함일까, 일 년 반이 지나자 화장도 할 수 있게 됐고 이전 피부처럼 보이게 됐다. 다만 멋진 희극인 박지선씨의 일이 이제는 나와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건, 아직 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으로 이제는 소량의 약을 2~3일 바르면 일주일은 무탈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가끔 내성이 생길 수 있는 약 특성상, 더는 약이 내게 듣지 않는 악몽을 꾼다. 더 무서운 건 그게 악몽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거다. 그때의 내가, 2014년의 나의 다를 수 있을지 박지선씨와 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을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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