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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Dec 05. 2020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다 / 이루시엔

  어릴 적 책을 쓰는 아버지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책 쓰는 건 지금도 대단한 일이지만, 고작 6살 남짓 되던 아이에게는 더욱 더 대단해 보인 일이었다. 어린아이 눈으로 보면 ‘뜻도 모르는 글자가 빽뺵이 있는 책을 쓰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이 아닐까’ 한 거다. 그렇게 글 쓰는 일은 막연한 동경을 동반했고, 하기 싫은 수많은 일 중에서 그나마 하고 싶은 일이 됐다.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기보다는 나도 똑같이 글 쓰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관심이 생기면 파고들 수밖에 없다. 학교에 다니면서 백일장이나 끄적였던 시기를 넘어 기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닥치는 대로 여러 글을 읽었다. 양치기가 통했는지 어느새 어떤 류의 글을 좋아한다는 취향이 생겨났다. 그리고 내 취향에 맞게 쓰는 사람을 발견할 때면 주저없이 팬임을 자처했고, 그게 한 사람을 좋아하는 큰 기준까지 됐다. 딱히 내가 글을 기막히게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기에 언시 준비를 하다가 감탄이 나올만한 글을 쓴 사람이면 마음이 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고백하자면, 한 사람은 인디밴드 가수이자 작가로 활동한 가을방학의 정바비다. ‘현란하지 않고 솔직한’ 글을 좋아하는데, 정바비가 낸 산문집은 꾸밈없이 자신의 삐딱한 생각을 써나간 문장들로 차 있었다. 단숨에 팬이 돼 그 사람이 작사한 모든 노래를 섭렵했다. 노래 가사 또한 투명했다. 다른 한 사람은 같이 언론 쪽을 지망하던 사람이다. 본인이 품은 생각을 민망해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자신만의 공간에 올리곤 했다. 그게 내 맘에 들었다.


  두 사람의 글이 좋아 그들에게 인간적인 호감까지 생겼다. 어떤 한 사람을 무엇보다 솔직하게 드러내는 수단을 글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마음의 ‘창’ 같은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솔직한 글을 쓰는 사람은 당연히 매사에 솔직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게 큰 오산이었음을, 글과 자신의 삶은 충분히 유리될 수 있음을, 최근 들어 연달아 깨달았다.


  성범죄 사건 가해자로 지목된 정바비와 꾸밈없는 문장과 가사를 써낸 정바비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다른 모습이다. ‘취미는 사랑’이라고 하고 ‘이름이 맘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누군갈 좋아하게 되는 내가 이상한 걸까’하며 속삭이는 가사를 쓴 사람이 성범죄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당신이 보고 싶다’는 기분 앞에 보기 좋게 당하고만 루저들끼리 의기소침하게 시작하는 연애’를 찬양한 그는 누구란 말인가.


  다른 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옆에서 겪어봤더니 그는 글에서나 꾸밈없을 뿐, 그의 삶은 실제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솔직하지 못했다. 솔직함 비어있는 자리에는 꾸며댄 자기합리화와 고집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옳은 말을 건네도 그 말조차 자신만의 논리로 무참히 무시하고 자신이 깨달은 것만 진리인 양 글을 올렸다. 속 빈 강정이었다. 솔직 담백한 글이라고 생각했던 건 그의 고집과 편견의 산실이었을 뿐이었다.


  글이 곧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실망감이 컸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더 솔직하려고 아등둥바등하는 지도 모르겠다. 솔직함이 잘 표현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내 글의 지향점이다. 작가와 작품은 다르게 봐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괴리가 심한 건 유체이탈과 다를 게 무엇인가 싶다. 어릴 적 무작정 글을 동경했다면 이제는 동경보다 내가 글을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두렵게 된다. 글을 쓰다 보면 좀 더 멋있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완벽한 구성을 갖추고자 겉멋만 부리게도 되는 탓이다. 찌질하더라도 있는 힘껏 내 글에서는 솔직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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