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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Dec 23. 2020

어차피 애니팡 / 이루시엔

게임

  애니팡이 처음 나왔을 때를 기억한다. ‘동물 퍼즐 터뜨리는 게 뭐라고 이거 때문에 연락도 안 하던 사람에게 하트까지 보내?’라고 투덜거리다가 금세 애니팡에 빠져들었다. 시도 때도 없는 하트를 받다가 하트 왕따가 되기 싫어 반강제적으로 시작했다.


  그땐 몰랐다. 그로부터 약 9년 후 지금도 여전히 애니팡 류의 게임을 즐기고 있을 줄은. 정확히는 룰만 살짝 다른 ‘프렌즈팝콘’이지만 편의상 애니팡으로 지칭하려 한다. 어쨌든, 카톡 이모티콘을 공짜로 준다는 행사 덕에 다른 게임을 할 기회가 있어도 다시 퍼즐 터뜨리기 게임으로 연어처럼 돌아갔다.


  그렇다고 애니팡이 그렇게 무적의 게임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들 머릿속에서 애니팡은 많이 잊혔고 순위권에는 새로운 게임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그 말인즉슨 애니팡이 날 못 놓는 게 아니라 내가 애니팡을 못 놓는다는 거다. 새로운 게임이 손에 익기까지가 너무 힘들뿐더러 애초에 새로운 게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잘 들지 않는 탓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게임, 저 게임 도전해보는 재미가 내게는 꽤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이런 성격 덕분에 그 재밌다고 하는 ‘어몽어스’도 한번 시도했다가 관뒀다. 적응 기간을 참지 못하고 퉁겨져 버린 것이다.


  옆에서 친구들이 ‘어몽어스 한번 해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라고 했지만 난 예외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간을 돌아봤을 때, 난 익숙한 게 제일 좋았다. 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특히 취업 준비생 때 양심에 찔리는 일이 많았는데, 당장 월급은 받고 싶으니 ‘도전을 좋아합니다’라고 수없이 자기소개서에 써낸 일이다. 다 거짓말이다.


  강제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면 당연히 이 악물고 한다. 다만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에서는 안정을 강하게 추구한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서 괜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도,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도 않다. 회사 부서가 바뀔 때면 새로운 일을 할 생각에 두근거린다는 친구의 말에 눈만 동그래진다. 일하면서 당연히 손에 익고 적응될 걸 아는데도, 내겐 설렘보다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내게 부서가 바뀐다는 건 지금까지 근무해온 회사가 흔들리는 일이다. 이래서 이직도 겁내는 건가 싶다. 반수도 안(못)했는 데 뭘.


  사람 관계는 오죽하랴.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추구한다. 그렇다고 인간관계에 큰 뜻과 철학이 있어서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다. 단지 내게 넓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 때문이라도 넓은 인간관계를 쌓으려고 하면 스스로가 ‘나 지금 연기하고 있구나’가 바로 자각된다.


  ‘자만추’ ‘인만추’를 선택해야 하면 ‘무조건 자만추’를 외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소개팅이 재밌다는 이야기가 세상에서 제일 신기하다. 친구도 아니고 애인을 만들러 가는 자리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오는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유대관계를 쌓는단 말인가.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다고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이야기는 30분이면 끝난다. 영혼 없는 ‘그렇구나’ ‘정말요?’ ‘신기하다’ 3연타를 내뱉고 있다가 2시간을 넘기면 집에 갈 궁리만 하고 있다.


  도전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부럽다. 그렇지만 지금 성격도 불만은 없다. 온갖 새로운 것에 개복치가 돼서 불편할 때도 많지만 그 덕에 한 번 친해지면 십년지기는 금방이고 지금 회사도 벌써 5년이다. 이러다가 10년 근속 휴가를 받게 생겼다. 남자친구도 주변에서만 만나서 웬만한 남사친은 다 사라졌지만 애매하게 옆에 있는 것보다 낫다. 이 자리를 빌려 지금도 내 옆에서 오랫동안 나의 애니팡이 된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반강제적으로 내 삶에 들어온 애니팡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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