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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an 21. 2021

슬로 스타터에게 바치는 핑계 / 이루시엔

어떤 시작

  ‘금사빠’는 ‘ 금사식’이라는 말을 믿는다. 이건 어쩌면 경제의 법칙이다. 시작에 투자한 시간이 적을수록 투자한 돈이나 시간, 마음까지 거둬들이는 건 기회비용이 크지 않으니 쉬울 수밖에 없다. 이를 헛소리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물론 예외는 있다. 새로 시작하는 행위는 늘 불편했다. 그 모든 ‘ 처음’을 결심하는 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들을 따라가기는커녕, 무엇을 처음 시작할지 고민하다가 지치기도 일쑤였다. 인간관계에서 회피형은 싫다고 말하곤 했는데 처음과 시작에 있어서는 오히려 내가 그랬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자 싶었다. 시작이 느리다는 것은 두려움의 발현이었다.


  사회생활로 인해 낯 가리지 않는 척을 할 수 있게 됐다. 처음 본 사람과도 두 세시간은 거뜬히 이야기할 정도의 재간을 갖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하는 눈초리는 숨길 수가 없더라. 당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으므로 일적인 사이 이외에 다른 친밀한 감정의 교류는 굳이 시작하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이런 경계심은 나를 둘러싼 어디에서나 나타났다. 어떤 일을 꽤 수월하게 시작하지 못한다. 시작 하나 하려고 하면 허둥지둥하는 꼴이다. 시작하는 게 맞는 건가, 시작 방법은 무엇인가 잘 모르니 돌다리를 부술 때까지 두드린다.


  그렇게 남들이 성큼성큼 해내는 일도 심호흡이 꼭 필요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물론, 돈 벌면 제일 먼저 다니게 된다는 헬스장이나 운동, 재테크, 독립, 하다못해 매일 하는 일 처리까지. 주변에 시작을 빠르게 하는 능력자들을 보면 한순간 부러워지긴 하지만 그마저도 순간이다.


  다행인 건 가장 최악의 단점은 늘 가장 사랑하는 모습과 함께 온다는 것이다. 시작이 어려운 만큼 시작을 놓는 일도 어렵게 됐다. 두 글자로 줄이면 근성이다. 이것도 어쩌면 경제의 법칙이다. 시작까지 돌다리를 부술 만큼 많은 공을 들였으니 쉽게 물러서지 못한다. 어떤 일을 피치 못하게 그만둬야 할 때는 며칠 밤 마음이 뒤숭숭하다. 주변인들도 쉽게 곁에서 떠나보내지 못한다. 사이가 소원해질 때면 경계를 풀기로 결정했을 때까지 내가 어떤 고민을 했는가를 되짚어 보며 퍽 슬퍼진다.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겠다고 결정하고 많은 강연을 돌아다닐 때였다. 입사 팁이니 뭐니, 들었던 건 기억이 안 난다. 어떤 여자 선배가 자기가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이라며 알려주던 내용이다. “계속 기자로 일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은 보람있는 기사가 아닌 입사 전 읽은 책의 권 수, 떨어진 시험, 썼던 글들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말로 기억한다. 그런데 맞다. 기자로 기사를 계속 쓰는 일 보다, 기자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아까워 계속 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시작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실패의 시간도 아니고 결단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더디고 느린 시작은 더디고 느렸음에도 ‘ 시작’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 지속’할 수 있다. 오늘도 나와 같은 모든 슬로 스타터에게 그럴듯한 핑계를 하나 더 만들어 본다. 게으르고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은 근성이라는 이름으로 두 세번 감싸고도 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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