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Nov 27. 2020

어떤 섬네일들 / 박브이

사진 같은 순간

  서툴렀던 첫 연애에 마침표를 찍어 가던 봄. 잠시 떨어져서 시간을 갖자는 말에 기다리겠다는 말 이외의 대답을 떠올리지 못 했다. 정리해야 할 생각이 많아 시간이 필요했을 그 친구에 비해, 내게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잠실에서 남산으로, 다시 남산에서 잠실로 하염없이 걸었다. 고작 몇 주였지만, 걸을 때마다 들었던 노랫말마따나 내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는 견디기 힘이 들도록 쌓여갔다. 한남대교 위에서 노을이 맺힌 강물이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어두운 바다를 떠돌아 다니는 부서진 조각배 위에 누인 내 작은 몸(1)’이었다. 결국 그렇게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아직 더위에 잡아먹히지 않은 초여름 밤. 보기 좋게 쌓인 장작을 덮은 불꽃이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을 장단삼아 춤을 추었다. 한 켠에는 줄지어 늘어져 있는 빈 맥주캔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타닥, 타닥, 나무가 열에 갈라지며 오고가는 수다의 틈을 채웠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것이 이상하지 않은, 편안한 침묵이 가끔 들러 앉아있다 갔다. 그러다 모두가 알고 좋아하는 노래가 스피커에 흘러나왔다. 저마다의 높낮이로 멜로디를 입에 머금었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2)' 순간을 맞대고 있는 이들의 안녕을 속으로 빌었다.


  조용히 지쳐가던 가을.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고 있는지, 할 수는 있는지 자꾸만 물음표를 붙이게 되던 일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에는 일이 쏟아졌고 저녁에는 마무리해야 하는 하루하루였다. 어제 제대로 맺지 못한 일은 오늘의 걱정이었고, 오늘 미뤄진 일은 내일의 부담이었다. 그러다 간만에 온전히 마무리가 되었다는 느껴졌던 날이 있었다. 내가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하루. 평소보다 많이 늦게 마친 그 날, 퇴근길 차 안에서 왠지 모르게 떠오른 노래를 틀었다. ‘확실한 것만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3)’라며 노래를 몇 번이고 따라 불렀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오래된 겨울. 교복을 안 입어도 되는 날이면 종종 도시의 이곳 저곳을 쏘다녔다. 특별한 목적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혼자임을 주체하지 못할 때 하게 되던 소박한 취미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집 근처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나중에는 TV나 책, 노래가사에서나 보고 들었던 종로, 삼청동, 동대문, 강남, 압구정 같은 곳을 찾아 가서는 무작정 돌아다녔다. 그렇게 처음으로 신촌을 찾았다. 그 날 마침 걸음 걸이를 맞추고 있던 노래가 눈 앞에 있었다. ‘카페 간판 위로 깜빡이는 불빛, 바쁜 걸음으로 집에 가는 사람, 술집 불빛 아래 사람들의 웃음, 저녁 장을 보는 시장 속의 풍경(4)’. 그 이후로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신촌에서 보내게 되었고, 신촌은 지금까지도 내게 늘 갈색의 거리이다.


  기억할 수 있는 어떤 순간은 모든 것이 정지된 장면으로만 남는다. 그대로도 좋지만, 종종 노래는 그 장면에 시간을 불어넣어주는 힘을 갖는다. 고요하게 멈춰있던 섬네일의 버튼이 눌려, 어떤 멜로디나 어떤 가사와 함께 짧고도 길게, 길고도 짧게 한 편의 영상으로 재생된다. 영상으로 남는 기억들은 장면일 때보다 조금 더 풍성한 추억이 된다. 그 추억은 다시 어떤 노래로 하여금 의미를 지닐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노래를 듣다가 어느 하루의 어느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그 순간이 떠올라 어떤 노래를 찾아 듣게 되듯이. 추억은 자주 노래에 빚을 진다. 노래 또한 그렇다.


(1) 이승열, <기다림> (2003)

(2) 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2010>

(3) Awesome City Club, <Around the World> (2016)

(4) 브라운 아이드 소울, <Brown City> (2003)

매거진의 이전글 나로 있게 하는 당신에게 / 박브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