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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an 07. 2021

변해가네 변해가네 다 변해간다 / 이루시엔

2020을 보내며

  시험공부가 제대로 안 되면 “그냥 봐버리자” 싶다. 시험 범위를 끝까지 다 훑지도 못했다는 두려움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다. 후딱 끝내버리자는 생각뿐이다. 그게 딱 연말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심정이다. 2021년이 크게 기대되는 건 없지만 탈도 많고 소소하게 즐거웠던 2020년아, 어서 가버려라.


  올해를 돌아보니,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는 게 매우 어색한 일상이 돼버렸다. 연말 분위기도 크게 안 난다. 회색빛 도시라는 말이 어울린다. 불행 중 다행으로 3일 넘게 집에만 있어도 질리지 않는 집순이 성격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코로나 블루를 심하게 겪지 않아 아직은 버틸 만 하다. 일에 치이는 일상에서 유일한 스트레스 돌파구로 여겼던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다는 거 빼고는 무난한 한 해였다. 무난하게 일하고 무난하게 사람들 만나고 무난하게 먹고 자고 유튜브를 본다. 코로나로 인해 어색한 사람들을 만나는 빈도가 줄어들어서 살짝 미소짓고 있긴 하다.


  겉으론 무난했지만 속은 천방지축이었다. 아홉수라는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뭔가 일이 틀어지면 ‘이런 게 아홉수인가’ 싶었다. 무언가 안정되고 하나라도 이루고 싶었던 새해 다짐과는 달리 2020년 겨울은 코로나 소식으로, 그리고 찾아온 봄은 이별로 맞았다. 지독히도 관심없었던 부서에 배치받았던 탓에 일에는 점점 재미를 잃어가고, 결혼은 언제 하려고 그러냐, 돈은 좀 모았냐, 회사는 어떻게 할거냐는 어른들 잔소리에 괜히 마음 속이 곪았다. 민망한 소리지만, 자기 전에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큰 이유없이 눈물이 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는 동안 말 수도 꽤 적어졌다. 작은 낙엽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호들갑이 디폴트값이던 친구들과의 수다는 유난으로 치부되었고 서로의 고민을 굳이 파헤치지도 않았다. 나의 속도 좀처럼 내보이지 않으려 했다. 무난한 삶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고 감정 기복 없이 혼자서 척척 해결해 나가는 게 이제는 미덕이라 생각했다.


  이런 속도에 맞춰 나를 둘러싼 주변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서른을 앞둬서일까. 아니면 각자의 직장이나 공부에 너무 적져서져 일까. 어쨌든 대학 때와는 달라진 삶의 무게 탓인가보다. 친구들을 보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은 달라졌다. 포기하는 게 하나둘씩 많아지는 게 보였다. 입사 전후 꿈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이 시국에도 월급이라도 나오는 게 어디’냐는 주말드라마 속에 나올 것 같은 대사를 입에 달고 살고 있다. 궁전 같은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던 이들은 서서히 자신의 위치를 말하며 통장 잔고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떨떠름하진 않은 한 해였다. 돌이켜보면 속이 뒤집어지면서 마음 근육이 조금은 단단해졌으며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모토 하에 난생 안해보던 운동에도 퍽 재미를 붙였다. 또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얼마나 깊고 소중한 관계인지 알게 됐다. 재미없다는 하루하루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재미있는 일을 굳이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하나둘씩 포기해가면서 절대 포기가 안 되는 것들은 무엇인지도 다시금 알게 됐다.


  2년 전인 2018년 연말은 친구 집에 모여 파티를 했다. 1년 전인 2019년 연말, 허겁지겁 일을 끝내고 서둘러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영화도 봤다. 심지어는 옆에 있는 사람과 2020년 연말 계획까지 세웠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과 2021년 신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사람 일은 모를 일이고, 앞으로 나한테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내년엔 어떤 소소한 웃음거리와 몰아치는 고민이 있을지, 남들이 말하는 ‘서른의 무게’는 또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일단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나도 앞으로 간다. 아듀 2020, 웰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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