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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an 25. 2021

시작, 그 익숙함에 대하여 / 박브이

  경비 시스템을 해제하고 문을 연다. 다다닥 스위치를 한꺼번에 누르면, 냉장고의 진동만이 조용히 울리고 있던 공간에 징 하고 전등이 켜지는 소리가 얇게 얹혀진다. 차례로 더해진 환풍기와 냉난방기의 굉음을 그날의 기분에 따라 튼 음악으로 덮는다. 바닥을 가볍게 쓸고 닦은 다음, 의자와 테이블, 메뉴판을 가지런히 정돈한다. 여기저기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보며 준비해야 할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날 틈틈이 해야할 일을 떠올린다. 전날 씻어서 말려둔 집기를 제자리에 놓는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그 날의 시작은 마무리된다.


  특정한 공간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내주어야 하는 가게의 일상이란 이렇게 손님을 기다릴 준비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느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도, 라멘집에서도, 학교 앞 술집에서도 그랬다. 어떤 손님이 와서 어떤 주문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 궁금하지만, 그것과는 상관 없이 행해져야 하는 전제의 영역. 세세하게는 다르지만 크게는 비슷한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비로소 그 공간에서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원두를 골라 커피를 내리기도 하고, 책상 위의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한다. 조용히 앉아 종이 신문을 뒤적이거나, 메일을 쭉 훑기도 할 것이다. 이렇듯 형태는 다양하지만, 각자의 매일 매일에는 어딘가 익숙한 시작들이 있다. 이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습관은 분명히 각각 다른 내용으로 적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반복되는 일상의 범위로 묶어준다.


  사실 점점 시작이라는 단어와 멀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탄생이라는 숙명적인 시작을 경험한 이후로, 처음을 마주하는 일은 줄어들고 새로움은 낡음이 되어 쌓여가는 탓일까. 혹은 처음인 것은 신기하지만 서툴고 새로운 것은 신선하지만 낯선 법임을 깨달아 버려서, 그 서툼과 낯섦이 주는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무언가를 어떻게 시작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망설임에 머리 속 어딘가가 가려워진다.


  그럼에도 다시 오늘은 시작되고 늘 내일의 시작을 향한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시작이란 이토록 일상과 가깝다. 그래서 어쩌면 언뜻 처음 또는 새로움과 닮아 거창해야 할 것만 같은 시작은, 생각보다 그저 그렇게 지나가게 되는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시작을 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다시 가게를 열고, 커피를 내리고, 물을 주고, 신문과 메일을 읽는 만큼의 용기가 아닐까. 딱 일상을 이어나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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