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10년의 변주

예술다반사

by Save Point

최근 참 바빴다.


업의 특성상 일이 몰리는 시기가 일 년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있다. 그 때가 되면 정말 눈코 뜰 새없이 바쁘다.


그렇게 주말도 없이 오늘 출근하면 내일 퇴근하는 날들이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하루 하루를 정신없이 버티던 어느 날, 와이프가 대뜸 말했다.


팬텀 뮤지컬을 예약해 두었으니 모레 세종문화회관으로 7시반까지 무슨일이 있어도 오라고.


아니, 이렇게 바쁜걸 알면서 대뜸 뮤지컬이라니.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다. 난 모르겠고 어렵게 예매했으니 무조건 오란다. 아이들은 부모님께 봐달라고 이미 말도 다 해놨다고.


이건 뭐, 생떼도 이런 생떼가 있나 싶었다.


약속한 그날이 되었고 다행인건 일이라는 게 어떻게든 되려면 된다고, 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6시 반에 뛰쳐나올 수 있었다.


최적의 동선을 위해 지하철 안에서도 바지런히 움직였고, 1차 지연 관객으로 2분 늦게 입장할 수 있었다.


2분 정도 늦은 건 정말 대성공이다.


정숙이 우선이니 와이프랑 인사도 생략하고 뮤지컬에 집중했다.


사실 작품에 대해 깊이 생각할 틈 조차 없었다. 우선 너무 바빴고, 게다가 이 작품을 이미 10년 전 초연으로 봤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지금의 와이프와 함께였다!)


당시에도 엄청난 감동을 주는 작품이었고 장면과 노래가 워낙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기에, 10년 만에 본다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큰 착각이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했던가. 봤던 작품이니까- 하고 방심해서 보던 나는 어느새 무대에 깊게 빠져들어 관람했고 커튼콜엔 누구보다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내게는 10년 전과 같지만 또 다른 작품이었다.




박효신은 변했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이제 40대 중반이다.


그러나 전혀 녹슬지 않은 실력과 그에 더해진 관록으로 10년 전 보다 더 나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제법 있는 액션신도 여전히 어색하지 않다.


그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섬세함과 절절함 위에, 반 박자 더 고르는 숨과 단단한 울림이 생겼다.


그의 노래도 늙었으리라 생각했던 내 예상을 시간을 역행하는 모습으로 깨버리는 변화를 보여줬다.



팬들도 변했다.


극 중 '에릭'은 선천적 기형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다닌다. 이 상황은 극이 끝날때 까지 유지되며, 커튼콜 끝 무렵에 무대에 불이 꺼지기 직전 찰나의 시간 가면을 벗은 얼굴을 딱 한번 보여준다. (물론 가면 안은 배우 본연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찰나, 모든 팬들의 환호가 울려퍼진다. 꺄아아아악--.


10년 전에는 고막을 때리는 환호 소리에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제 그 함성은 와아아아아-- 로 바뀌어 있었다.


10년 전엔 박효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숨이 가빠지고 그의 얼굴이 드러나는 찰나에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던 팬들이었다. (감히 해보는 추측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부터 10년의 세월을 함께 쌓아온 관객이 되었다. 비명 대신 터져나온 환호는 단순한 열광이 아니라, 무대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존중처럼 들렸다.



나도 변했다.


나름 공연과 뮤지컬을 좋아해서 젋었을적엔 대학로도 꽤나 자주 갔었다.


그 소극장 특유의 생동감과 분위기에 매료되어 많은 작품들을 보러 다녔고, 김종욱 찾기와 빨래 같은 그 당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캐스팅 보드가 바뀐 걸 확인할 때마다 몇 번이고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는 잘 우는 관객은 아니었다.


그다지 신봉하지 않는 MBTI로 치자면 대문자에 볼드체를 더하고 폰트 100짜리의 T가 나였으니까.


그런데 자꾸 팬텀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아랫 입술이 삐쭉거리고 눈물을 막아보려 눈을 깜빡 깜빡 하게 된다.


슬픈 장면도 아닌 앙상블 씬에서 괜히 뭉클해질 때도 있었고,


에릭의 어린시절을 솔로로 노래하는 장면을 보다가도 우리 애보다 두어살 더 먹은 것 같은데 저렇게 떨지 않고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짠해지고 눈물이 나려 했다.


물론 엔딩씬과 커튼콜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이를 먹고 나타나는 호르몬의 변화일까. 내 주변 환경이 변화되어 내가 느끼는 감정도 변화된 것일까. (스스로를 '에겐남'이라 칭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다.)


둘 다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와이프에게 들키는 것은 부끄러워서 티안내고 열심히 울었다.





그렇게 극이 마무리되고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치고 나왔다.


무대도, 대사도, 장치 하나도 변한건 없었다. 내가 달라져 극을 또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극 중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10년동안 그 자리 그대로였고 마치 나만 밖에 잠시 살다 다시 그들의 삶을 엿보러 들어온 느낌이었다.


나는 공연 동안 에릭의 절망과 사랑에 공감했고, 배우들의 목소리에 10년을 되짚어 보았으며, 앙상블 속 어린 배우들에게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마음을 느꼈고 그래서 제라드 카리에르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공연장을 나와 재미있었냐고 묻는 와이프에게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수사를 붙이기 보다는 격한 끄덕거림으로 진심을 표하고 싶었다.


음악, 감동, 형용사 등등. 과중한 업무에 삶의 윤활요소를 잠시 잃은 내게 정말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내가 이 뮤지컬 한 편에 이 정도의 재충전이 될 것을 와이프는 알고 있었을까.


아마 알고 있었겠지. 팬텀의 10년이 변한 것을 느꼈듯, 내 지난 10년을 지켜본 유일한 관객이니까.


내일부터 또 바쁘겠지만 와이프와 맥주 한 잔 하고 들어가야겠다.






당연히 그 날 열연하셨던 모든 배우님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용 중 특정 배우만을 언급한 건 10년 전의 캐스팅 보드와 같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쁜게 끝나 너무 행복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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