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하드코어 이야기
# 식스 센스
첫 죽음의 위기가 내 플레이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퀘스트와 적의 난이도를 색으로 표현한다.
이 색상 체계는 단순한 디자인이 아닌 생존을 가늠하는 나침반이다. 회색은 이미 나보다 한참 약해 경험치도 의미도 없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초록색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쉬운 적을 의미하며 노란색은 나와 동등한 수준으로 도전할 만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그리고 붉은색은 나보다 훨씬 강한 적들로, 무모한 도전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크로스로드의 임무는 대부분 노란색과 적색만이 남아 있었다. 이는 평범한 플레이어에게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지만, 아이템 거래와 원조를 차단한 자수성가의 길을 고집하던 내게는 특히 더 가혹한 도전이다.
제대로 된 갑옷을 갖춘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무기는 채광 재료를 상인에게 헐값에 처분하고 겨우 구매한 가장 낮은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이제 크로스로드에 남아있는 퀘스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결심하고 나는 주무대를 동부왕국의 언더시티로 옮기기로 한다.
언더시티.
오만과 광기로 물든 유토피아적 이상이 스스로를 삼켜버린 왕자의 몰락 아래 지어진 도시.
인간들의 번영과 찬란이 꽃 피우던 도시는 짓이겨진 석조의 잔해로 남아있을 뿐, 언데드가 되어 버림받은 인간들은 포세이큰이란 이름으로 그 지하에 다시 모여들었다.
언더시티(UnderCity)라는 뜻 그대로, 그들이 인간이었던 시절 머물던 수도의 폐허 아래 하수구와 지하수로 사이에 자신들만의 죽음의 왕국을 창조했다. 그들은 인간이었던 자신을 부정하고 죽음과 부패의 미학을 받아들인 채 새로운 힘을 추구한다.
언더시티가 머리에 이고 있는 수도 로데론의 폐허는 기억을 담는 살아있는 증거물이자 과거와의 단절과 독립을 선언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곳은 언데드로 새롭게 출발하는 플레이어들을 위한 레벨업 루트가 존재하며 나는 그곳에서 다시 성장의 활로를 찾기로 한다. 경험치가 조금 더디게 쌓이더라도 결국 살아남는 것이 하드코어 서버에서의 유일한 승리이니까.
오그리마를 떠난 고블린들의 비행선은 어둠과 안개가 깔린 바다를 가로질러 나를 데려갔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스치는 동안 마음속에는 이상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죽음의 위기를 넘긴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요한 결의였다.
그 때 채팅창에 누군가의 사망 메시지가 올라온다.
이 알람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적응하기가 어렵게 신경을 긁어대는 날카로움이 있다.
이번 데스로그는 최고레벨을 달성한 사제가 인스턴스 던전에서 사망했다는 메시지였다.
채팅창은 다들 남일 같지 않다는 마음으로 애도를 표하기 바쁘다. 나 또한 얼마전에 겪은 죽음 직전의 위기로 남일 같지 않았기에 애도를 표한다.
그런데 그때 채팅창에서 죽은 사제의 매몰찬 메시지가 올라온다. (실제 아이디를 기재할 수 없으니 편의상 A로 표현)
A : 아니 죽은 건 죽은거지만 파티원들 너무하시는거 아닌가요?
...죽은 자가 말을 한다.
사실 이때까지 죽어보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고 딱히 죽고 나서 말하는 캐릭터가 없어서 몰랐을 뿐이지, 누군가가 아제로스 대륙을 떠나게 되더라도 그들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또는 남은 이들의 안녕과 당부를 위해 게임적 허용으로 채팅이 가능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물론 원망과 시시비비도 포함해서.
A : 힐러가 맞으면 몹을 떼 줘야지 안떼주고 바로 다들 죽척, 소멸하고 도망갑니까? 파티원 살리려고 보호막에 힐에 제가 어글 다 먹었잖아요. 하다못해 애도 정도는 표해도 되는거 아닌가요?
현실에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망자가 갑자기 입을 열어 "잘 왔다. 네 이놈! 네놈이 날!!" 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기절하거나 도망쳤을 테니까.
채팅창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파티원 모집이나 잡담, 도움 요청 등 모든 메시지가 사라진다. 누구도 말이 없다.
죽은 이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엔 분노가, 억울함이, 그리고 슬픔이 묻어 있었다.
상상해보자. 내가 사후 유언을 남길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까. 특히 그 죽음이 타인의 실수로 인한 결과였다면?
잠시 후, 그 파티를 리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사 B가 말을 꺼낸다.
B : 죄송합니다. 제 리딩이 부족해서 사고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죽은 것에 대해서는 제가 꼭 보상하겠습니다. 애도 못 드린건 죄송합니다. 저도 심란해져서요.
당연히 보상이 가능한 방법은 없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정해진 수의 플레이어가 협력하여 진행하는 고난도의 전투 구역을 "인스턴스 던전"이라고 한다. (흔히들 줄여 인던이라고 부른다.)
던전 내의 적들은 바깥보다 훨씬 강하고 조직적이며 몬스터마다 고유의 패턴과 배치가 존재한다.
보통 5인이 한 팀을 이루고 각각의 역할(방어, 공격, 치유)을 수행하는 형태로 공략하게 되며 난이도가 높아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나뉘고 누구 하나만 실수해도 전체가 위험해진다.
도망칠 길은 멀고 좁으며 한번이라도 전투를 시작한 적은 끝까지 쫒아온다. 그래서 한번 상황이 어그러지면 빠르게 파티의 전멸로 이어진다.
가상의 세계에서는 응당 서로가 최선을 다해 상황을 헤쳐나간다. 실패해도 다시 고민하고 심기일전하여 도전한다. 그것이 이 가상 세계에서의 묘미이고 정수이니까. (오히려 빠른 전멸을 유도하고 다시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나 하드코어 서버에서는 그 규칙이 묘하게 비틀린다.
죽으면 끝이라는 전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묘하게 갈라놓는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위해 나는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일시적 파티가 가지는 구속력은 어디까지일까?
누군가는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소화하며 때로는 그것을 넘어선 희생적 선택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죽지 않기 위한 절박함에 파티보다 본인의 생존을 우선시 할 것이다.
그 본능적 경계가 어디인지,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위기가 닥쳐오기 전에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미루어보건대 그 생사를 가르는 순간 희생적 선택을 했던 것이 사제 A였고, 본인의 생존을 우선시 것이 전사 B 였을것이다.
그 순간 파티의 고유 역할은 붕괴되고 상황은 빠르게 악화된다. 생존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타인의 죽음일지라도.
죽음 앞에 빠르게 드러나는 다른 이들의 진심에 사제는 허탈해하며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사제 A는 전사 B의 사과에 초연함을 유지하며 으례 서로를 위로하는 말을 이어간다. 감히 짐작컨데 그 텍스트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은 일단락되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사제 A처럼 끝까지 남아 모두를 지키려 했을까, 아니면 전사 B 처럼 일단 살고 보자고 판단했을까.
당연히 전자라고 외치고 싶지만 정확한 답은 없다.
나 역시 아직 그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하드코어 서버에서 살아있다는 건, 언젠가 반드시 그 선택의 순간에 다다를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인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 나는 그 순간이 닥쳐왔을 때 어떤 행동을 하던 후회없는 결심을 하자.
생각이 이 즈음에 다다랐을 무렵, 비행선은 목적지에 도달해 언더시티가 저 멀리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낸다.
그리고 죽음으로 죽음을 거부한 지하도시 앞에서 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하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던 나는,
언더시티의 엘리베이터에 발을 헛디뎌 낙사하고 만다.
추락의 순간은 스무살즈음 첫 번지점프를 뛰던 날 느꼈던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5화 예고, 첫 인스턴스 던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