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기르는 거였다

내가 나의 귀인이 되기로 결심한 날

by 활귀인
나는 내 삶을 봄날 밭을 갈 듯 완전히 갈아엎었다.


제대 후,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껴 무작정 해외로 나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군대에서 모은 돈을 들고 계획도 없이 떠났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치열하게 살다 보니, 한국에서 연락하던 친구들과도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인간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처음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한 시기였다.


해외에서 일하면서는 많이 외로웠다. 그럴수록 일에 더 집중했고, 외로움을 지우기 위해 몸부림쳤다.

사람이 고독을 견디지 못해 망한다는 말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일까.


해외에서 일하며 돈을 벌던 그 시절, 겉보기에 나는 ‘성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대학도 안 나왔는데 해외에서 일한다고? 대단하네.” 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반면 부모님은 겉으로는 “우리 아들 해외에서 일하고 있어”라고 말하지만, 대학 졸업하고, 남들이 다니는 회사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나를 보며 답답하게 느끼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인생인데, 어쩌겠는가?

결국 내가 행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당당하게 나의 삶을 살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해외에 나간 이유 중 하나는, 나를 간섭하던 부모님과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스스로에게 독립적인 삶을 선물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동안은 그렇게 느끼며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여전히 심리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행복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 삶을 부러워할 수 있지만, 나는 그 당시 삶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정말 괴로웠던 건,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점점 나를 잠식했다.

우울과 무기력이 스며들었고, 나는 내가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잠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니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우울증은, 더 이상 내가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정말 맞는 말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가면을 쓰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뭐지?”

“나는 언제 행복하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지?”


답이 없는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금씩 내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그때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좋은 것과 안 좋은 것 모두 다)


지금의 나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집도 없고, 차도 없고, 학벌도 없다.

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정말 행복하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건 결국 ‘마음’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다.


같은 환경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지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오랜 시간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에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즐겁고, 일하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하루를 마치면, 스스로 뿌듯함에 잔잔한 행복을 느낀다.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유튜브, 릴스, 술 이런 단기적 도파민과는 다르게

강도는 약할지 모르나 잔잔한 행복은 오랫동안 지속이 되고 이후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


덕분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우울의 터널을 지나

나는 이제, 새 삶을 살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함께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그런 나와 자주 대화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주고, 나를 돌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라는 걸 점점 더 느낀다.


타인과 비교하고, 나를 돌보지 않는 순간들에서 불행의 씨앗이 뿌려진다.

그 씨앗들을 하나하나 뽑아내며, 다시 밭을 갈아야 한다.

그리고 행복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사람은 편안해진다.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진짜 자존감은

“나는 잘났어”라는 허세가 아니라

내 결핍과 결점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만들어온 나의 방어 태도를 인정할 때, 비로소 나는 나다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내면은 단단해졌고, 생각은 깊어졌으며, 나만의 삶의 철학이 생기기 시작했다.


책을 멀리하던 내가 책을 읽기 시작했고,

약하고 두려운 나의 부분을 마주하기 위해 도망치지 않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나에게 ‘활귀인’이 되자”라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결심하고 난 후 지금의 나와 비교해 보면 내가 스스로 느껴질 만큼 정말 많이 변화됐다.

삶의 의지가 없던 내가, 이제는 생기로 가득 차 있다.

행복을 느끼기 시작하자 모든 일에 의욕이 생겼다.


그런 나를 표현할 단어가 필요했고, 그래서 만든 말이

‘활귀인’이다.


귀한 사람을 살리는 사람.

나는 귀한 사람이고, 그 귀한 사람을 살려낸 사람.

바로 '나 자신'이다.


우리는 종종 잊는다.

내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존재만으로도 귀하다”는 말이 한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떠올랐다.


얘는 돈을 벌지도 않고, 일을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매일 밥을 챙겨줘야 하고, 산책도 시켜줘야 하고, 병원도 데려가야 한다.

그런데도 그 존재만으로 너무 사랑스럽고 위안이 된다.


사람이 귀하지 않을 리 없다.

내가 귀하지 않을 리 없다.


나는 귀한 사람들에게 숨통이 트이는 말들을 해주고 싶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방법이 있고, 길이 있다는 걸

영혼을 살리는 말들로,

예전의 나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닿고 싶다.




귀인은 멀리 있지 않다.

나 자신이, 나의 활귀인이 될 수 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나라는 존재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혹시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보는 힘이 없다면,

우리 함께 천천히 만들어가면 된다.

이 글이 당신 삶의 작지만 분명한 변화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 하루도,

작은 감사들이 피어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