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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동물의 친구 Apr 27. 2018

함께 살아가는 야생동물

이 땅에 살아가는 야생동물의 벼랑 끝 외침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었습니다. 문명이 미치지 않은 자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백과 같은 상태로 취급됐죠. 그 일부이기 때문일까요? 야생동물 역시 그렇게 여겨졌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 정도로 말이죠.

 
모두 각자의 삶을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존재 야생동물.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녀석들이 계속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 뿐, 야생동물은 우리와 같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며 오래전부터 함께해 왔습니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너구리의 삶이 지나가며 파인 발자국을 따라 발맞춰 걸어가고,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엔 방금까지 황조롱이의 삶이 머물러 있었으며, 햇살이 눈부시게 일렁이는 강물 속엔 갖가지 물고기의 삶이 헤엄치고 있습니다.  

소복히 쌓인 눈 위에 선명하게 남은 너구리의 발자국.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와 야생동물이 무수히 많은 것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날 그 과정에서 인간이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막대하다는 점입니다.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건물을 지어 살고, 흙을 파내어 도로를 깔아 빠르게 이 동하고, 흐르는 물을 가둬 이용하는 우리의 편리한 삶 말입니다. 덕분에 도시의 빌딩은 숲을 이룬 채 끝 모르게 높아지고,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관광지가 되어 깎여 나갔죠. 유리창과 충돌해 새들이 나뒹굴고, 달려오는 차량을 미처 피하지 못해 숨을 거두는 동물이 부지기수지만, 유리창을 없애고 운전을 하지 말자고 얘기할 순 없습니다. 문명의 이기와 야생동물과의 공존의 간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문명의 이기와 야생동물과의 공존은 가능한걸까?


야생동물과의 공존은 결국 윤리적 영역입니다. 어쩌면 내 삶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지 모를, 이름 모를 존재에 대한 막연한 연민이 기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곳의 이야기는 온몸으로 버텨 내느라 곳곳에 생긴 상처를 지닌 야생동물의 삶을 대신해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윤리적 책임을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명의 이기라는 특권에 취한 우리의 걸음에 치이고 치여 어느새 낭떠러지까지 내몰린 동물들의 삶을,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정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그 낭떠러지에 서게 될 존재는 다름 아닌 우리일 테니까요. 

그리고 아직, 함께 살아가기에 늦지 않았으니까요. 

벼랑 끝 야생동물. 함께 살아가기엔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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