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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Nov 18. 2020

60년 만에 사과를 받았다

이브 앤슬러의 <Apology> 1

악당이 히어로에게 사과를 하면 더 이상 악당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많은 히어로물의 악당은 끝내 사과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과도 닮아 있다. 현실의 악당들은 끝내 사과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전투가 끝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고생하는 것은 주인공 히어로다. 계속 싸움을 걸며 제 빈곤한 자아를 수복하는 악당과 달리, 히어로는 싸움으로 얻는 잇점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를 원하는 자가 원치도 않는, 승부도  결론도 나지 않는 싸움을 계속하면 늙는다. 종지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결말을 냈다. 


미국출생의 극작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세계적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작가 이브 엔슬러. 그는 남성 폭력,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이며 <뉴스워크> 선정 ‘세상을 바꾼 150명의 여성’과 <가디언> 선정 ‘100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60대에 들어 마침내 그가 평생을 씨름해 온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내놓았다. 가해자인 아버지의 내면을 낱낱이 파헤쳐 책으로 낸 것이다. 


현실에서는 물론 사과를 받지 못했다. 이브에게 신체, 정신, 성적 폭력을 가했던 아버지는 책임을 철저히 회피한 상태로 3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브는 스스로가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영혼만 남은 상태에서 진심 어린 사과 편지를 보낸다는 설정으로 이 글을 썼다. 


사실 이러한 시도를 한 것은 이브 엔슬러가 처음은 아니다. 수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사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을 뿐 다양한 컨셉과 도구와 방법을 써서 이로 인해 상처입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그로써 내부에 자리잡은 비감을 공개하여 다른 사람과의 링크를 만들고, 공감받고, 이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패트릭 멜로즈를 쓴 세인트 오빈의 경우에는 자전적인 소설로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꿨다는 면도 있지만, 단순히 본인이 겪었던 사고의 순간만을 1차원 적으로 그려낸 게 아니라 본인 주변 사람들의 상황도 그려냄으로써 문학적 가치를 높였다. 


이브의 경우에는 좀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가해 이유, 가해했을 당시의 심리 및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묘사했다. 즉, 괴물의 내부를 탐사한 것이다. 피해자들이 가장 하기 두려워하고 끔찍해하는 것 중 하나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괴물의 내부를 탐사하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해 도움이 되는 작업이다. 학대나 폭력 피해자들은 죄책감이나 수치심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면, 본인이 겪고 있는 어두운 감정이 사실은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서 온 것임을 분석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가해자는 본인의 죄의식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는 짐을 덜고 가벼워지는 길을 택한다. 피해자는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어두운 감정의 일정 퍼센테이지가, 사실은 가해자가 떠넘긴 것일 뿐 본인의 짐이 아니라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 이브가 탐사해 낸 가해자의 심리 몇 가지를 맛보도록 하자.



“나 또한 네가 너 자신의 경험과 인식, 너의 가치에 의문을 갖도록 여러 기술을 사용했어. 가장 잔인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와중에도 네가 경험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네가 과장스럽고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라고 얼마나 많이 설득했니. 네가 겪는 고통은 전혀 고통이 아니라고 얼마나 많이 강조했니. 널 벽에 밀쳐버린 것도 내 사랑이 너무 커서 그런 거라고 말했었지. 다 너를 위해 이러는 거라고.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너를 의도적으로 혼란케 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는지. 내 목적을 위해 사건을 얼마나 조작하고 얼마나 많은 증인과 조력자들을 등장시켰는지.” 



자기의심, 자기 객관화는 분명 대단한 재능이다. 맨 몸으로 불 속으로 뛰어들면서 ‘나는 무적이다!’를 외치는 것보다는 ‘나는 다만 인간일 뿐이고….’라면서 주섬주섬 소방 장비를 챙기는 게 얼마나 귀한 장점인가. 나도 지키고 남도 지키는 기술이 자기 객관화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고통이 된다. 학대나 폭력 피해자들은 자기 의심 능력이 지나치게 극대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가해자때문에 학습이 지나치게 잘 된 나머지 불필요한 경우에도 자기 의심을 소환한다. 


폭력을 당하던 당시로 되돌아가 보자. 가해자는 스스로의 잘못을 상대의 반응을 통해 확인하고 싶지 않다. 내가 내 키의 절반도 안 되는 아이를 때려서 아이가 나를 노려본다면 내 양심이 서걱거리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는 아이에게 말한다. 


‘네가 맞을 만해서 맞은 거야. 폭력을 당할 만해서 당한 거야. 난 너를 지도하기 위해서 때린 거라고. 넌 나에게 감사해야해.’ 


아이는 이를 반박할 힘도, 이를 납득하는 부당함과 자기 파괴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나보다 지식과 경험이 많은 어른이 하는 말이니까 옳을 거야.’


아이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가 양심에 찔릴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빈도도 높다. 폭력에 맛들인 가해자들은 도무지 이같은 재미를 끊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즉, 못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같은 행위(폭력 등 가해 행위-수치심-피해자에게 수치심 전가)를 반복하게 되고 만다. 일주일에 두세 번이 듣기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얼마나 잔혹할 정도로 빈번한가? 회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반복되는 이 과정들은 어린 피해자를 검은 색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하다. 이에 피해자들은 자신의 감정, 아픔, 고통, 괴로움, 원망, 분노를 부정하는 습관이 들고 만다. 아주 단단하게 말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적의 적은 친구


나중에도 설명하겠지만, ‘의심을 의심’하는 것을 추천한다. 어차피 스스로를 겸손하다 못해 바닥까지 깎아내리고, 폭력를 행사하는 당사자 대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학적인 버릇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고치더라도 오랜 세월이 걸린다. 나 같은 경우는 거의 20년 가까이 그같은 세뇌를 받으며 성장했는데, 두 가지 면에서 버리기 힘들었다. 첫째는 어린 시절 내내라서, 둘째는 매우 오랜 기간이라서다. 지금도 노력 중이지만 이 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고 있다. 


폭식하는 버릇을 버리는 것은 힘들어도, 새로운 마법의 가루를 음식에 뿌리는 것은 쉽다. 금연은 힘들어도 흡연 후 가그린으로 입냄새라도 없애는 것은 쉽고 말이다. 그런고로 스스로를 의심하는 자신을 발견하자 마자 그런 자신을 다시 의심하는 것을 추천한다. 즉, ‘재의심’이다.


말이 쉽지 해보려면 쉽지 않다. 행동이 아니라 머릿속에만 처리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현실로 끌어와야 한다. 이럴 땐 애런 위치만의 실험을 참고하자. 실험 내용이 좀 복잡한데 단순화해서 설명하자면 한 마디로 어떤 문장을 읽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나 혹은 눈동자라도 좌우로 흔들면 그 사실에 대한 긍정도가 낮아진다는 내용이다. 즉, 스스로를 의심하는 문장이 떠오를 때, 고개를 힘차게 좌우로 흔들면 그 의심에 대한 확신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저 사람 말을 듣고 가슴에 못이 박힌 것처럼 답답하고, 얼굴에 열이 오르네. 화가 나는 것 같네. 화를 내는 게 지금 정당한 일일까? 내가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게 잘못된 게 아닐까? 내가 예민한 거야.”라고 스스로를 의심했다면 고개를 힘차게 흔드는 거다. 지금 올라온 부당한 자기 의심, 가해자가 심어놓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버릇을 재부정하는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우스워보이고 별 것 아니어 보이겠지만 한번 해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해자의 독에 물린 상처는 꽤나 깊고, 이 독이 몇십년에 걸쳐 온 몸의 순환시스템에 흘러왔기 때문에 부정적인 요소를 빼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Aaron L. Wichman, Pablo Prinol, Richard E. Petty, Derek D. Rucker, Zakary L. Tormala, Gifford Weary(2010), Doubting one's doubt:A formula for confidence?,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Vol.46  (2), 35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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