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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Nov 21. 2020

아버지의 학대가 손상시킨 것

아동학대를 당한 이브 엔슬러의 <Apology>2

너는 스스로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여 헤로인을 복용하고,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시속 160킬로미터의 속도로 차를 몰곤 했다. 

나는 너에게서 평범한 일상을 빼앗았다. 나는 너에게서 가족에 대한 개념을 파괴해버렸다. 네가 네 엄마를 배신하도록 만들었다. 너를 영원한 자기 증오와 죄의식 속에서 살게 했다.(….)나는 너를 착취하고 학대했다. 나는 너의 몸을 소유했다. 너의 몸은 더 이상 너의 몸이 아니었다. 나는 너를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너는 누구든 널 원하는 사람에게 마지못해 몸을 주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혼란과 무감각 속에서 너는 너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어. 나는 너의 안전과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을 손상시켰다. 그렇게 해서 네가 강간을 통해 자극받도록 만들었다. 네 것이 무엇인지, 언제 ‘노’라고 말하고 어떻게 ‘그만둬’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도록 너의 경계를 파헤쳐버렸다. (….)나는 네가 스스로를 창녀라고 느끼도록 만들었어. 진정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도록, 친밀함에 대해 폐소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었지. 너에게 나의 독을 남겨 놓았다. (….)

나는 네가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하게끔 만듦으로써 너의 기억을 파괴했다. 그렇게 너의 지능은 물론 진실을 추구하고 고난을 감당하는 능력에 영향을 끼쳤어. 



길지 않은 문장이다. 많은 것이 담겨 있지만 일이 분이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문장이 되어 나오기 까지 적어도 몇 년은 걸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혼자서 알아낼 수 있는 쉬운 숙제도 아니고, 하나를 알았다고 해서 그 다음이 자동으로 딸려 나오는 학교 수업처럼 체계화된 목록도 아니다. 이중에서 겨우 몇 가지를 깨닫는 것도 지난한 시간이 걸린다. 

또한, 이같은 문장을 체화하고 이를 글로 적어내려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사회의 고정관념이다. 역사가 승자의 것이듯, 사회의 상식 역시 다수의 것이라서 ‘어떤 아버지는 딸을 사랑하지 않으며, 신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한다’라는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에 이 문장들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내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 문장이다.



‘너는 누구든 널 원하는 사람에게 마지못해 몸을 주었을 것이다. 언제 ‘노’라고 말하고 어떻게 ‘그만둬’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도록 경계를 파헤쳐버렸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자와 20여 년 동안 함께 해 온 연구와 임상 작업을 한 권에 녹여낸 아주 유명한 책이 있다.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케임브리지 병원 `폭력 피해자 프로그램(The Victims of Violence Program)`의 교육 이사 주디스 허먼이 쓴 <트라우마>다. 과거 외상을 입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한 문장 한 문장이 파고들어온다는 느낌이 걸맞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그는 이 책 이외에도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에 의하면 부모로부터 성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 성폭력을 당하는 비율도 높았다. 또한 결혼 후 그녀의 자녀들이 또다시 근친 성폭력에 노출될 위험도 크기에, 이같은 폭력의 고리는 유전되는 경향이 있음을 밝혀냈다. 


이는 근친 학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방어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성폭력의 경우 성적인 자기 방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타겟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브 엔슬러의 고백은 정확히 이 부분과 링크되어 있다. 아버지의 신체적 학대는 아동에게 나와 타인간에 일어나는 폭력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어디서부터가 폭력이고 어디서부터 갈등인지 알지 못하는 아동기 학대 피해자들을 나는 종종 마주쳤다. 그들은 폭력이 발생하는 지점과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간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말싸움조차 폭력으로 받아들였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었다. 나는 앞서 아동기 학대 피해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실과 같은 말을 해 줄수 있는, ‘너의 부모와의 갈등은 네가 가진 환상일 뿐이야,그것은 네 머릿속에나 존재하겠지’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동족’들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일은 어렵다고도 말했는데, 이를 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에는 트라우마를 주제로 다양한 채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중 한 방에 들어갔을 때 막 목격한 일이었다. 분명 상대방은 적의를 가지고 말한 게 아닌데도, 그 방을 만든 방장은 상대가 자신에게 악의를 가졌다는 전제 하에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작은 오해도 엿보였다. 대화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그걸 풀어나가는 것이 또다른 재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방장은 별로 공격적이지 않은 그를 ‘공격적’이라며 강퇴시켰다. 어디서부터가 폭력이고 자신을 향한 적의인지 알지 못하는 자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행동은 세월과 함께 적립되어 그를 돕는 게 아니라 결국은 고립시켜서, 가장 안전하지 못한 상태로 이끌게 될 것으로 보였다.


비슷한 원리가 근친 성 학대를 당한 피해자들에게도 발생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어디까지가 내가 원하는 것이고 내가 정말 이 사람과 성적인 행동을 하기를 원하는 것인지, 내가 그저 해리 상태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콤함에 취해서 멍해진 것인지에 대한 구별이 없다 보니, 원치 않는 성관계를 거부할 힘도, 이 관계가 본인이 원치 않는 것인지 아니면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인지도 어렵다. 그렇기에 부모에게 성 학대를 당한 사람들은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성인이 된 후 몇 번이고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당하는 입장에 놓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비교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을 비교하겠는가. 그의 반의 반 밖에 되지 않는 크기와 몸집인 어린 아이가 상대에게서 성적인 행동을 강요당하는 것과 지금은 엄청난 차이다. 반격의 여지가 전자의 경우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하면, 이제는 그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반격의 성공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같은 뿌듯함은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를 파악하는 능력,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눈치채고 자리를 피하는 현명함, 부당하고 불쾌한 상황에 처했을 때 분노를 표현하는 힘까지 주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 역시 이브 엔슬러가 묘사했던 것처럼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게 나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트라우마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온다.


1980년대 초기에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다이애나 러셀(Diana Russell)은 가장 정교한 역학 조사를 진행하였다. 무선 표집으로 선별된 9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참여하였고, 가정폭력과 성적 착취에 대한 심층 면접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여성들은 4명 중 1명의 비율로 강간을 경험하였다. 아동기 성학대는 3명 중 1명의 비율로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62p)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단테가 지옥의 소재를 가져온 곳은 우리의 이 현실세계가 아니면 어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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