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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Nov 10. 2020

나는 언어에게 버림받았었다.

나는 한 번, 언어에게 버림받았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한 심리유형 모임에서였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은 갈색이었고, 부드럽고 주먹만한 우아한 컬이 들어가 있었다. 도톰하게 잘라낸 앞머리는 쾌활한 느낌. 갸름하면서도 하얀 얼굴까지, 잘 다듬어진 클래식 삼중주를 보는 듯한 정갈함이 감도는 모습이었다. 좌우지간 웃음이 많았다. 내게 호감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맑게 빛나는 눈동자, 서글서글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다양한 주제로 스몰토크를 했다. 그날은 겨울의 끝자락이었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아마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 관심을 표현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순전히 물리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말을 붙일 기회가 적었다. 그녀의 옆은 내가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에게는 어딘가 연약하면서도 유혹에 약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나는 이 밤샘 모임에서 그녀를 늑대들로부터 보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불한당을 쫓으려는 결의로 주변을 맴도는 경찰견처럼, 그녀가 요청해오지도 않은 비밀스런 호의를 바탕으로 견제 작업을 실행했다.


우리는 번호를 교환했다. 공통점이 많았다. 취미도 비슷했고 하는 말도 어딘가 맥락이 비슷해서 깔깔 웃고 손뼉도 쳤다. 몇 주 지나서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삼십 분 정도 채팅을 했다. 그리고 나는 밤샘 모임에서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언어가 부서져 있다.


종종 단어 사용이 정확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 책을 잘 읽지 않거나, 운동을 많이 좋아하거나, 학교 수업보다는 실용적인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확하지 않은 언어 사용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이것은 어딘가 부서져 있을 때 나오는 사용법이다. 


이 사용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나도 아직까지는 그러한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있을 뿐이니까. 이에 대한 논문이나, 책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순수한 나만의 과제다. 몇 년이 지나야 조금이나마 가닥이 잡힐 지 알 수도 없는.


그녀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나중에 물어본 바, 정말로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녀의 언어 사용이 정확하지도, 조밀하지도, 상황에 부합하지도 않는 미묘한 어긋남이 있다. 그리고 단어를 끼워맞추고 짜맞춰도 이 갭은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다. 이는 사실, 본인의 입장에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물이다.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가 재활을 위해 긴 철봉을 잡고 간신히 걷는 형상처럼 말이다. 어떻게든 언어의 세계로 돌아오려고 노력한다. 문명의, 평화로운 세계에 내려앉아 살고 있는 흉내를 내려고 용을 쓴다. 하지만 그 노력에 대비하여 결과물은 아무래도 좋지가 않다. 


과거의 나 역시 그랬다. 나 역시 언어에게 버림받았었다.


한참 고통에 지고 있던 당시, 나는 일반적인 사람과는 좀 동떨어져 있었다. 인간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했다. 이는 여러 면에서 그러했는데, 그 중에서 지금 돌아보면 나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였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내가 더 이상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던 순간이다.


언어란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트라우마로 절뚝거리기 이전, 나는 언어로 만들어내는 세상이 좋았다. 시인들은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여 그를 분쇄한 베이스로 한참 뭉근하게 끓여낸 다음, 정제된 단어를 조합하여 결과물을 뽑아냈다. 그건 현실을 넘어선 영역에 한 발 걸쳐 있었다. 분명 현실에서 뽑아낸 것이지만 다른 세상을 볼 수도 있는 다리였다. 그건 소설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멋진 거짓말쟁이들이지만, 동시에 진실만을 말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들의 거짓에 속고 싶어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진실과 거짓 그 중간의 어디쯤으로, 흑백을 가늠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얇은 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글을 읽는 것은 영화보다 더 나에게 신기한 작업이었다. 영상에는 한계가 있고 제작자의 의도가 너무도 명확히 드러나 있어 그저 ‘현실’에 불과했지만, 글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상상에는 한계가 없다. 작가가 말한 내용으로 내가 떠올린 세상은, 아마 다른 독자가 같은 작가의 글을 보고 떠올린 것과는 한참 차이가 있는, 내 입맛에만 지독하게 맞춰진 결과물이니까 더 중독성이 있다.


황홀했다. 언젠가는 이 사람들처럼 뭔가를 쓰고 싶어, 그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복합 트라우마로 짓밟힌 나는, 마치 트럭에 받힌 승용차의 뒷좌석 같아졌다. 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면서 그전에 잘 했던 작업을, 당연하게 해왔던 작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도무지 상황에 맞는 단어가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트라우마는 전두엽을 손상한다. 나는 내 뇌 속의 무언가가 갈기갈기 찢겨졌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으니까 무시하려고 했다. 


현재의 나는 세네 줄 정도의 문장을 끌어오는 데 그다지 많은 힘을 들이지 않는다. 물론 적절한 표현이나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은 왕왕 있다. (사실 자주 있다.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그건 더 심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세네 줄을 쓰는데 삼십 분씩 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러했다. 지금은 세 줄을 적는데 5분 걸린다고 하면, 그때는 20분, 30분이 걸렸다 언어가 말이 되어 엮어 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두뇌의 다양한 부분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모아도, 땅에 떨어져 있는 단어들을 툭툭 털어서 사용하려고 해도, 도무지 어떤 단어가 떨어져 있는 것인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라던가, ‘어떤’, 혹은 뭉뚱그려서 상황을 설명하거나, 그도 아니면 뒤죽박죽인 문장을 적어내고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기에서 멈추곤 했다.


그래, 지금은 언어가 돌아왔다. 100%는 아니어도, 그전에 5%의 기능을 했다면 지금은 60%정도로 수복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지나칠 정도로, 분할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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